나는 한일 관계 악화를 다소 복잡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사회 갈등을 다루는 노선은 "개입은 하지 않고 목소리를 키운다"이다. 일례로 젠더 '갈등'에서 이 정부의 태도는 애매하기 짝이 없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하며 여성 운동을 지지하는 포즈를 취했지만 명확하게 반여성주의와 선을 긋지 않는다. 가령 “정권의 페미니즘 지지로 20대 남성 지지율이 떨어져 나갔다”는 문구가 있는 정권 내부 보고서가 유출돼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여성 가족부는 ‘여성 차별’이 아니라 ‘양성 차별’ 류의 논조를 잡고 행사를 기획했고, 몰카 근절 캠페인에서 여성을 몰카 소비자로 묘사해 공분을 부른 적도 있다. 그렇다고 성별로 나뉘어진 진영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다. 정치는 사라지고 여론과 여론 사이 대결과 저주가 사회를 뒤덮고 있다.
최근 한일 갈등에선 기회주의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설령 박근혜가 체결한 '위안부' 배상 협약이 졸속이더라도 이전 정부가 맺은 외교 협약의 효력은 인정한 상태에서 그걸 물리기 위한 최소한의 소통 절차를 밟아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통보해버린다면 향후 어떤 국가가 한국 정부가 맺는 외교 조약의 장기적 효력을 신뢰하겠는가. 이런 '신뢰의 파기'가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라는 '대항 조치'를 택할 수 있게 한 논거가 된 측면도 있다. 취소한 것 까지는 좋다고 하자. 대법원이 강제 징용 배상 판결을 내린 것도 옳은 결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협약을 재협상하고 배상을 받아내려는 외교적 시도가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는 이전 정부의 협약은 따를 의무가 없다, 삼권분립이니 행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논리로 방관하고 있고 여당 정치인들은 일본을 향해 명백히 불필요한 말 폭탄을 던진다. 이 정부는 과거사를 풀기 위해 외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사를 빌미로 외교를 극단으로 몰고 간 후 거기서 손을 놔 버린다.
일본과의 대결 국면 장기화가 과연 국가가 복무해야 하는 정의로운 가치에 기여를 하는지도 의문이다. 한일 관계가 벼랑으로 갈수록 일본 내 극우파의 입지는 커지고 고조되는 반한 여론에 일본에 사는 한국인, 재일 교포들의 안녕은 위협받는다. 역사가 누구를 위해 필요하고 외교가 무엇을 위해 중요한가? 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같은 국적과 정체성으로 엮인 시민들을 위한 것 아닌가? 한국의 울타리 안에 있는 국민들은 외교가 악화돼도 직접적 위협은 입지 않는다. 일본 사회와 교류하거나 그 안에서 고립된 이들이 덮어쓰는 거지.
현재 한국인은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나는 나의 인신과 의사 결정이 집단의 결정에 종속되는 것을 거부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심정 자체는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과거사는 국제적 범죄 행위이고 그것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역사적 배경이 이러한데 아베 정부가 수출 규제라는 도를 넘은 강공을 취했으니 분개해서 반격하려는 마음이겠지. 여기엔 어떤 종류의 공분이 실려 있고, 자신들이 인식할 수 있는 한도에서나마 옳고 그름을 가리겠다는 열정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국민은 화를 낼 수 있다 쳐도, 정치인은 화를 내라고 뽑은 사람들이 아니잖은가. 무슨 ‘깊은 빡침’ 콘테스트를 열어서 선발되는 것도 아니고. 여론에 기대 목청만 키우지 말고, 수출 규제가 사회에 입히는 타격을 직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 행보를 보여 달라는 뜻이다.
갈등을 조정하지 않고 갈등에 편승하거나 갈등을 조장해서 반사이득을 얻는 것이 현 정부의 통치 노선이다. 노무현도 이런 타입의 정치인이었지만 그것이 대통령 개인의 성품과 가치관에서 비롯한 면이 있었다면 문재인 정부는 전략적으로 갈등을 착취한다. 한동안 하락했던 여당의 지지율은 반등하고 있다. 잔뜩 대로한 얼굴의 여당 정치인들은 돌아서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