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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Jun 11. 2019

파라노이드 유토피아

아이돌 팬덤 문화의 주소지

아이돌 팬덤 문화엔 독특한 은어가 있다. '써방'(서치 방지, 타 그룹이 검색되지 않도록 이름을 변형해 쓰는 것) '언금'(특정 주제 언급 금지) ‘빽녀’가 그렇고, '눈새'란 말도 특정한 문맥에서 자주 쓰인다. 팬덤 문화의 폐쇄성과 배타성을 알려주는 관습들이다.

타인의 이름, 타인에 관한 주제를 입에 담지 말라는 건 서로 '엮이는 짓'을 하지 말자는 뜻이다. 타 그룹과 함께 거론되는 것이 남 좋은 일만 시키거나 우리 이미지를 떨어트리고, 서로를 겨냥한 구설수가 될 수 있으니 암묵적 분계선을 긋는다. 팬덤 내부의 방침은 한 방향으로 정렬되어야 하고 이걸 어기는 사람은 '눈치 없는 새끼'라 배척당한다. 의견과 의견, 주체와 주체가 교차하며 공론이 일어날 가능성은 차단되고, 팬덤 내부에서 이견이 제기될 가능성도 억압된다. 스스로를 자정하고 관행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정치적 논의'는 박멸된다. 예컨대 각 팬덤이 논란에 대응하는 공통된 패턴은 자기 가수의 처신이 옳은지 그른지 논하는 게 아니라, 다른 가수도 같은 행동을 한 적이 있다고 까발리며 진흙탕 싸움을 여는 것이다. 논의의 기준을 추락시켜 논쟁을 무용하게 만든다. 이건 아이돌 산업의 부조리가 존속되는 중요한 원인이다.

보이 그룹과 걸 그룹을 막론하고 아이돌 산업은 팬덤 산업으로 재편됐다. 조직력과 충성심 강한 팬덤이 너무나도 중요해졌고, 대다수 그룹이 코어 팬덤의 '현생'을 갈아 넣으며 지속된다. SNS 시대엔 가십이 무한 생산되고 타 그룹을 음해해 ‘내 새끼’의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음습한 관행도 만연했다. 소속사의 힘만으론 그룹을 보호할 수 없게 됐고 팬덤이 자경단을 꾸려 여론을 관리한다. 저들은 외부의 동향에 대한 과민반응이 만성화된 편집증 상태에 빠졌다. 그런 만큼 아이돌을 향한 동일시는 강력해졌고 보상 심리도 강해졌다. 이 경향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각종 사인회와 팬 미팅, 브이 라이브 등 유사 인격적 접촉과 유사 연애감정을 파는 팬 서비스가 심화됐다. 팬덤은 아이돌에게 어버이('내 새끼')와 연인의 환상을 뒤섞어 투사하고, 환상의 '공평한' 분배를 깨고 혼자서 아이돌에게 다가가 특권을 누리는 '빽녀'를 증오한다. 이건 관계의 현실성에 비해 명백히 과잉된 바람이다. 관계는 드물지 않게 파국으로 치닫는다. 아이돌의 열애 사실이 확인되면 그때껏 덮어주던 치부를 폭로해 앙갚음하고("안티보다 탈덕한 팬이 무섭다") 덧없는 후원활동에 '현타'를 맞고 '탈덕 논문'을 발표해 내부 고발-소비자 고발을 저지른다.

팬덤 문화에 나쁜 점만 있다는 건 아니다. 지금껏 아티스트 처우에 관해 회사와 싸워 온 한 주체는 팬덤이었다. 아이돌 가수의 사회적 비행이 터질 때 몇몇 팬덤이 지지 철회를 선언하며 바람직한 전례를 세운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 회사와의 대립이 아이돌을 통해 누리는 베네핏과 부합하거나 그것을 거스르지 않을 때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돌의 과도한 스케줄과 팬덤에게 제공하는 감정 노동은 아이돌 산업이 앓는 가장 큰 지병이다. 그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팬덤 사이에서 이런 문제가 제대로 공론화하지 않은 건 시사하는 점이 있다. 가령 트와이스 팬들은 얼마 전 사나가 겪은 민족주의적 비난을 앞장서 방어했지만, 혹사에 이른 트와이스의 스케줄에 대해선 오히려 ‘혜자이스’라 부르며 즐거워한다.

문제가 있어도 없는 셈 숨기고, 논쟁이 터질 빌미를 잘라 내는 데 몰두하는 것이 팬덤 문화의 도덕이자 교과서가 됐다. 이런 작태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눈새’ 혹은 타 그룹의 첩자 질을 하는 ‘분탕’으로 몰려 파문당한다. 문제가 곪아 터지고 나서야 '탈덕'을 선언하고 관계에서 빠져나와, 순애보를 배신당한 피해자처럼 자기 연민의 또 다른 폐쇄성으로 도피해 자의식을 핥는다. 그들에게 아이돌은 내 몇 년 간의 인생과 동의어 같은 존재이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이걸 건강한 애착 관계라 부를 수 있을까? 이 모든 상황의 돌파구는 팬덤 역시 문제를 가중하는 당사자라는 책임감과 직면해 비판의식을 일상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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