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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Nov 04. 2022

걸 크러쉬의 국제적 연결

걸 크러쉬가 이 사회와 산업에 준 것들 - 1

최근 걸 크러쉬와 중국을 키워드로 한 논문 한 편을 읽었다(‘중국에서의 K-팝 여성 아이돌 그룹의 걸 크러쉬(Girl Crush) 현상에 대한 연구’, 왕빙기, 2022. 2) 이 논문을 읽으며 중국 시장에서 걸 크러쉬 콘셉트가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나아가 몇 년 전부터 여성 아이돌 산업의 메인스트림이 된 걸 크러쉬가 이 산업에 무엇을 주었는지 궁리해 볼 착안점을 얻었다.      


걸 크러쉬는 흔히 강하고 멋진 여성상을 표현하는 스타일적 요소로 이해되지만 좀 더 넓은 틀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다. 걸 크러쉬의 어원적 정의는 여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호감이다. 현재 여성 아이돌 산업은 여성 향 산업으로 이행된 상태다. 사회문화 전반에서 여성들의 젠더적 각성이 일어나고 그들의 취향과 관점을 반영하는 문화 콘텐츠에 대한 요구가 떠올랐다. 즉, 여성 소비자들의 수요가 반영되는 한편, 그에 조응하여 세상과 자신을 말하고 응시하는 여성의 주체성이 담긴 콘텐츠라면 스타일적 요소와 관계없이 걸 크러쉬로 파악할 수 있다. 블랙핑크·아이들·에스파·엔믹스·르세라핌처럼 강한 박자감과 카리스마를 강조하며 전형적 스타일을 변주하는 그룹뿐 아니라, 레드벨벳·아이브·뉴진스처럼 부드러운 색채감으로 수놓인 그룹 역시 걸 크러쉬라 해도 틀리지 않다.      


중국 시장은 이런 젠더적 측면에서 한국 시장과 상동성이 있고 다른 해외 시장과 차별화된다. 중국은 남성 아이돌 팬덤이 주류인 일반적 시장과 달리 여성 아이돌 팬덤이 활발하게 형성되어 있다. 현지에서 계속 성장하는 앨범 공동 구매도 여성 아이돌 앨범 구매량이 남성 아이돌만큼 많다. 같은 인접 국가인 일본과 거울처럼 마주 보는 부분인데, 일본에서 선호되는 여성 아이돌이 예쁘고 귀여운 보수적 여성상에 가깝다면, 중국에서 선호되는 콘셉트는 단연 걸 크러쉬다. 이는 현지에서 ‘여성 경제’라 불리는 여성 소비자 시장의 존재, 현지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에 따라 여성이 다양한 산업의 소비자로 부상하고 특히 엔터 산업에서 팬덤을 구성하는 주역이 된 현상에 의한 것이다.      


중국에선 2005년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 여성 목소리>에서 우승한 이우춘이 신드롬을 일으킨 후 ‘중성풍’ 스타일, “이미지의 외형이 이성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자신의 성별 특성을 유지”하는 성별 구분을 횡단하는 스타일이 유행했다고 한다. 최근 2018년, 2020년 두 차례 아이돌 오디션 방송에서도 중성풍 참가자가 주목 받고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한편 앞서 말한 논문의 연구 참가자 중 한 명은 중국에서 최근 몇 년 간 페미니즘에 관한 토론이 열렬하다고 전하며 걸 크러쉬 스타일에 대한 선호가 젠더적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중국에서 최근 3년 동안 미투 운동이 진행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중국 페미니즘 활동가 뤼핀은 ‘플랫폼 C’에 번역된 ‘우이판을 무너뜨린 것은 변화된 여성들이다’란 글에서 케이팝 남성 아이돌 그룹 엑소의 전 멤버 우이판이 성폭력으로 구속된 사건이 미투 운동으로 축적된 중국 여성들의 역량이 이루어 낸 개가라고 감격한다.  

    

국내 기획사들이 걸 크러쉬를 메인스트림으로 받아들인 건 여성 소비자들의 요구나 그 스타일에 잠재된 젠더적 태도 때문만은 아니다. 걸 크러쉬가 서구의 사회상과 문화산업을 통해 이미 표준화된 글로벌 스타일에 부합한다는 이유를 빼놓을 수 없다. 걸 크러쉬는 케이팝 세계화의 도약적 단계에서 여성 아이돌들이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양식으로 채택되었고, 여성 향 산업으로 전환된 국내 시장 수요에도 부합하는 양면의 친화성이 있다. 이 구도에서 한국 사회와 케이팝이 서구 사회와 할리우드/그래미에 구조화된 페미니즘과 젠더적 진보를 따라가는 입장이라면, 일본 시장은 그런 흐름과 동 떨어진 시장이고, 중국 시장은 케이팝을 통해 케이팝이 서구에서 수혈한 진취적 여성상을 다시 수혈하는 성격이 있다. 이는 젠더 의제에 관해 중국 사회가 한국 사회와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비슷한 보폭으로 나아가고 있는 점과 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회는 페미니즘이 억압된 사회에서 그것을 뚫어 내는 저항적 움직임이 대두했다는 점이 닮았고, 한국 여성들이 울려 낸 파장에 중국 여성들이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중국 미투 운동의 상징으로 불리는 저우샤오쉬안은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엔번방 사건이 중국 여성운동에 큰 영향을 줬다고 말한 바 있다.      


중국 시장은 특유의 공구 문화와 개인 팬덤 성향이 회자되며 음판 매출을 맡겨 놓은 지역처럼 취급되거나 중국 팬덤은 ‘악개’(악성 개인 팬)이라고 타성적으로 폄하되곤 한다. 하지만, 중국 케이팝 시장은 여성 아이돌 수요가 많은 여성향 시장으로서 그 바탕에 깔린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국내 여성 아이돌 시장과 가장 지형이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국내 여성 케이팝 소비자가 남성 아이돌 팬덤인 채 여성 아이돌 팬덤도 두루 겸하는 속칭 ‘간잽’ 성향이 있다면 중국 팬덤은 코어 팬덤 성향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즉, 중국 공구 시장은 국내 음판 시장 규모를 보완해 주는 것을 넘어 국내 여성 아이돌 여초 시장과 동일한 코드를 소비하면서 그들의 제한적 구매력과 코어 팬덤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한다. 역시 남성 아이돌 팬덤이 주류라 여성 아이돌이 코어 팬덤을 얻는 데 장벽이 있는 여타 해외 시장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이상의 특성이 남성 아이돌과 여성 아이돌에게 중국 시장의 의미가 다른 이유고, 여성 아이돌은 중국 시장을 포기하거나 우회하고는 성장하기 힘든 이유다.


걸 크러쉬는 여성 아이돌 산업의 세계화를 촉진한 한편, 특정한 로컬 시장과의 구체적 연동을 통해 여성 소비자들의 욕구와 취향을 반영한 콘텐츠가 공급되도록 힘을 실어 주고 있다. 그것은 산업적 네트워크를 통한 여성들의 보이지 않는 국제적 이어 짐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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