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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Nov 11. 2022

포스트 걸 크러쉬

걸 크러쉬가 이 사회와 산업에 준 것들 - 2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나희덕의 시를 비평하며 시의 서정성을 이렇게 정의한 적 있다. “‘너무 빨리’가 세상의 시간이고 ‘너무 늦게’가 나의 시간”일 때 그 시차가 서정이다. 세상과 타인과의 조우의 실패가 빚는 “엇갈림과 사무침의 화석”이 시라는 말이다. 이 말을 가져와 다른 방면에 잇대어 보면, 00년대 한국 힙합의 시차도 세상보다 내가 느린 것이었다. 거기서 오는 자조와 공감이 지배적 정서였다면, 2010년대 이후 한국 힙합은 세상보다 내가 빠르다고 말한다. 세상의 시간보다 빠르게 성공했고, 남보다 빨리 이 사회 꼭대기에 올라왔다. 이것이 힙합의 전통적 관습 중 하나인 ‘자기 과시’의 시차다. 그리고 케이팝에서 이것과 동일한 시차를 가진 것이 ‘걸 크러시’다.      


실제로 걸 크러시 스타일은 가사와 스타일적 요소를 힙합에서 가져오고 성별을 반전한 성격이 있다. 스웨거 스타일을 여성 아이돌과 접목하는 데 앞장선 YG, JYP 같은 기획사가 힙합에 음악적 뿌리를 두고 있거나 콘텐츠를 제작하며 미국 힙합을 참조해 왔다는 배경과 관련이 있다. 물론 힙합은 어마어마한 남성적 장르다. 여성들이 걸 크러시에 기대하는 지향점은 그것과 배치되는 부분이 많다. 다만, 힙합의 스웨거가 나의 삶과 멋을 뽐내는 태도라고 할 때, 자기애와 자기 긍정을 확신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여자들 역시 자신을 뽐 낼 자격이 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고 싶다. 그런 해방감을 안겨 주는 것이 멋지고 당당한 걸음을 걷는 유형의 걸 크러시라는 말이다.


여기서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그 시차는 과연 정확한가. 나는 정말로 세상보다 앞서 있는가? 래퍼로서의 캐릭터와 현실에서의 삶이 일치하는지 캐묻는 것이 역시 힙합의 전통적 관습인 ‘진정성’이다. <쇼미더머니>에 막 출연한 무명 래퍼가 부와 명예를 이뤘다고 으스대도 손뼉 쳐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아가서, 힙합이 흩뿌리는 자기 과시와 그것을 들으며 몰입하는 사람들의 현실이 얼마나 포개지는지, 둘 사이 시차를 물을 수 있다. 나는 이 점에서 한국 힙합은 계층 이동이 어려워진 현실에서 여전히 자수성가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재생산하며 젊은 세대의 사회에 관한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구성한다고 지적한 적 있다(‘자기 계발의 보호 구역').


한국 여성들의 현실도 걸 크러시와 시차가 있다. 그들의 사회적 처지는 아직 노래가 표현해주는 여성상만큼 주체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을 왜곡하는 이데올로기로 빠지지 않는 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이미 현실과의 괴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문화 산업에서 여성들이 원하는 콘텐츠가 우세종이 된 건 이 사회와 문화계 전반에서 여성의 주체성이 소외돼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저변에는 현실에 대한 각성이 있고, 그것을 변화시켜 나가는 실천으로서 남성적 시각으로 왜곡되지 않은 여성상, 남성들처럼 주도적인 여성상을 마련해 달라는 요구가 분출되었다. 즉, 한국 힙합의 자기 과시가 창작자들이 수입해 유행을 주도한 관습이라면, 걸 크러시 유행은 기층에서부터 소비자들이 일궈낸 측면이 있다.  


걸 크러시란 말이 유행한 지도 벌써 오 년, 육 년이 지났다.  이제 따로 지칭하는 말이 필요가 없을 만큼 여성향 걸 그룹은 메인스트림이 되었다. 여성 아이돌 팬덤의 여초화 자체보다 그 상태가 보편성을 얻은 성질에 주목하는 것이 논의를 전환해 줄 수 있다. 여전히 이 산업에 남성 팬덤도 존재하지만 그들 역시 여성 취향을 반영한 콘텐츠를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소비하고 있다. ‘걸 크러시’가 남성 취향에 대한 대항마를 넘어 성별 취향을 불문하는 보편 양식이 된 것이다. 이 상태에 주목하고 어떤 사회문화적 파급 효과가 일어났는지 살펴 보자는 것이다.


영화이론가 로라 멀비는 영화에서 시각적 쾌락이 ‘남성적 응시’(male gaze)와 여성의 보여짐이란 구조를 재생산한다고 주장했었다. 요즘 여성 아이돌 산업에서 생긴 큰 변화는 남성적 응시의 퇴출이다. 남성의 욕망으로 바라보는 여성은 그 시선을 반영하는 수동적 대상으로 재현되기 쉽다. 여성 팬들은 응시의 대상이 아니라 응시의 주체로서 세상과 자아를 바라보는 캐릭터를 욕망한다. 이런 차이는 서사와 세계관은 물론 시각적 콘셉트에서부터 나타난다. 여성 팬들은 걸 크러시가 섹시 콘셉트로 전치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표현한다. 같은 종류의 의상이라 해도 섹슈얼리티에 따른 차이를 감지하고, 아이돌의 신체를 다루는 카메라 워크에 선정성이 있을 때 항의한다. 꾸준하고 적극적인 피드백을 통해 그들의 시각과 취향으로 산업의 표준을 재구성했다. 한국을 이르는 대명사 중 하나인 케이팝 산업에서 어느덧 '여성적 응시'가 남성적 응시를 대체하는 일상적 감각이 된 것이다.      


케이팝의 연대기를 되감아 보면, 남성 대중이 걸그룹에 열광하던 시기라고 여성향 그룹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남초 팬덤 그룹이라 해도 여성 팬덤의 취향이 꼭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여성은 늘 여성의 아이돌이었고 남성 아이돌에 비해 여성 아이돌 소비자는 성별이 혼재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 아이돌 산업이 여성향으로 동질화된 지금 시기는 특별히 책갈피를 꽂아 둘만 하다. 이제 케이팝은 걸 크러시가 메인스트림이 된 것을 넘어 포화된 상태로 왔다. 최근 데뷔한 뉴진스는 이러한 과포화 상태의 증상이다. 그 어떤 그룹보다 여성 팬 비중이 큰 그룹이지만, 걸 크러시의 주류 콘셉트와 정반대로 순정하고 화창한 빛깔로 기획되었다. 주체적 여성이란 테마 안에서 쏠림이 일어나고 수요를 개발하기 위해 반작용으로 새로운 대안이 등장했다. 이것은 장르 산업의 발달과 성숙에 따른 전형적인 현상이며, 여성 담론과 조응하는 콘텐츠가 획일화 될 만큼 확고한 정상성의 지위를 얻은 것이다.


이 상황을 걸 크러시란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걸 크러시가 일상화된 단계, 걸 크러시 이후의 새로운 걸 크러시 기획이 시작된 상태, '포스트 걸 크러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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