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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Apr 27. 2024

짜깁기한 대가족

민희진과 방시혁

민희진의 기자 회견은 거의 신드롬을 낳았다. 민희진은 기자회견 직전까지 궁지에 몰려 있었지만 상황이 반전돼 이제는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저 기자회견으로 분쟁의 쟁점이 제대로 설명되었다고 할 순 없다. 어도어를 차지하기 위해 회사를 빈껍데기로 만들겠다는 논의나 ‘프로젝트 1945’ 같은 내부 문건, 아티스트 정보 유출 등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거나 “상상에 불과하다”처럼 얼버무림에 가까운 설명으로 넘어갔다.      


민희진이 두 시간 동안 토한 열변은 지금껏 공론화된 쟁점과 별도로 자신이 하이브에 품은 불만과 사연의 보따리를 풀어놓은 것이다. 민희진을 지지하는 여론이 우세한 것엔 분쟁의 양방이 제기한 논점의 성격차이도 작용하는 것 같다. 하이브가 주장하는 경영권 찬탈은 상법과 주식, 회사 경영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엄밀하게 판단할 수 있는 딱딱한 주제지만, 민희진이 목청을 높인 레이블 간의 대우, 나아가 케이팝 산업 부조리에 관한 비판은 훨씬 직관적이다. 일반인들은 물론 케이팝 팬들이 더 판단하기 쉽고 호소력이 큰 주제다.     


하이브와 민희진 양 측의 주장을 종합했을 때 확인되는 사태의 원인은 하이브의 멀티 레이블 시스템이다. 하이브란 이름 아래 다수의 레이블이 공존하며 가수 제작을 맡아 동시다발적으로 아이돌 그룹이 데뷔하고 활동한다. 이는 외부의 레이블을 공세적으로 인수 합병하며 형성된 시스템인데, 단기적으로는 BTS의 공백을 틀어막기 위한 것이었고, 장기적으로는 리스크를 분산한 채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하이브를 상징하던 BTS가 소속된 레이블이자 하이브의 전신에 해당하는 빅히트 뮤직의 매출은 2023년 기준 5천억 정도지만, 나머지 레이블을 합친 하이브 전체 매출은 2조에 달한다. 이 시스템으로 확장된 사업 규모를 알 수 있다.     


하이브가 멀티 레이블 체제를 이룬 후에 착수한 건 다수의 IP끼리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소비자 파이를 증식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SM과 JYP가 선후배 가수들이 서로 콜라보를 하고 ‘회사 팬’이라 불리는 팬덤 유니언을 이룬 것처럼, 하이브도 멀티 레이블 소속의 아이돌들을 만남의 광장으로 불러냈다. 그건 쇼츠 챌린지처럼 눈에 보이는 단발성 콜라보일 수도 있지만, 서로를 ‘언플’ 자원으로 활용하고 이미지 자본을 떼어 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이브는 SM JYP와 달리 단일 레이블의 전통 없이 남의 팔다리를 뽑아 한 몸에 붙인 인공 신체 같은 조직이다. 레이블 간의 유대감이 없다. 오히려 동시다발적인 아이돌 론칭 시스템으로 인해 하이브의 지원과 실적을 두고 각 레이블이 잠재적 경쟁 관계에 놓여있다. 그리고 이 경쟁 구도가 가장 첨예한 것이 같은 시기 걸그룹을 제작한 어도어 레이블과 쏘스 뮤직이었다. 먼저 기획된 뉴진스를 르세라핌이 앞질러 나온 건 민희진의 발언으로 공인된 사실이 됐지만, 당시에도 두 그룹을 관찰하던 입장에선 충분히 짐작이 가는 사실이었다. 민희진이 어도어 레이블을 따로 차리면서 쏘스뮤직에서 트레이닝받던 연습생들은 물론 실무 인력까지 데리고 갔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여러모로 두 레이블과 그룹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조성돼 있었다. 민희진은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성토했지만, 수년 전부터 숨어있던 갈등의 포자가 공기를 타고 나타난 것뿐이다.     


문제는 멀티 레이블 자체라기보다 하이브의 비인도적인 운영방식이다. 이들은 자신이 거느린 아이돌 그룹을 비즈니스를 위해 부품화·사물화한다. 다수의 IP를 보유한 입장에서 특정 IP를 궤도에 올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미 성공한 다른 IP를 디딤판으로 끌어내려서 밟고 서는 것이다. 이 구도는 먼저 데뷔한 그룹이 새로운 그룹과 엮여 입지를 나눠 주는 ‘제 살 파먹기’ 일 수밖에 없다. 민희진이 성토한 아일릿과 뉴진스의 경우 아일릿이 뉴진스를 ‘카피’했다고 할 만큼 콘텐츠가 유사한 것은 아니다. 표절이라기보다는 저러한 IP 엮기 운영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 뉴진스의 콘셉트를 일부 차용하고, 뉴진스와 르세라핌의 댄스를 빌려 오면서 성공한 선배 그룹들의 이미지를 조명판 삼아 아일릿을 홍보하려는 것이다. 


그런 방식도 상호 동의를 구한다면 수행 가능한 마케팅 전략이겠지만, 알다시피 동의를 구하지 않아 논란이 된 상태다. 어도어 레이블은 방시혁과 오랜 인맥으로 엮인 소성진이 운영하는 쏘스뮤직, 지배 구조가 뚜렷한 빌리프랩과 달리 하이브와 사무적으로만 연결돼 독립적 성격이 강한 레이블이다. 저 전략이 다른 레이블과 달리 유독 어도어에서 반발로 돌아온 이유는 민희진의 개인적 기질과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는 양자 간 계약 문제일 것 같다.  


민희진은 뉴진스 역시 그 전략의 수혜를 입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데뷔 전 하니와 민지가 BTS 뮤직 비디오에 출연하고, 뉴진스가 ‘BTS 여동생’이라는 이름으로 무수히 홍보된 사실을 말이다. 뉴진스가 빌보드 핫 100에 들었을 때는 “BTS가 8년 차에 이룬 성과, 뉴진스가 6개월 만에 해냈다”란 기사가 떴고, 아일릿이 초동 신기록을 쓰자 “뉴진스를 꺾었다”는 헤드라인이 걸렸다. 얼마 전 한 예능에서 ‘하이브 사옥을 BTS가 다지고 세븐틴이 쌓아 올렸다’는 자막이 나간 것 역시 서로 다른 레이블의 그룹을 엮어서 위상을 나눠 가진다는 점에서 맥락이 동일하다. 같은 양상은 개별 그룹 내부에서도 벌어진다. 르세라핌은 ‘막내 케미’를 연출하기 위해 ‘경력직’ 멤버가 ‘할머니’ ‘보모’ 역할을 맡으며 낡은 이미지를 덮어쓰고 있다. 공생과 기생 사이에 있는 이 물고 물리는 관계의 대물림이 하이브의 뒤틀린 패밀리 쉽, '짜깁기된 대가족'을 상징한다.     


방시혁은 예전부터 그룹 내에서 세일즈를 책임지는 멤버와 자신이 ‘푸시’하는 멤버가 달라서 ‘방시혁 픽’이란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그런 어긋난 매니지먼트 구조는 방시혁이 손대는 하이브 그룹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이브는 아이돌을 대하는 태도는 물론 기업을 운영하는 가치관이 병들어 있다. 그 문제가 어떤 조직 문화라기보다는 소수 고위 임원 개인의 성격과 성향, 취향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때가 많다.     

 

민희진은 같은 회사의 아이돌 그룹, 멤버 이름을 마구잡이로 거명하며 악을 쓰는 걸 보면 그냥 자기 억울함이 제일 중요한 사람 같아 보인다. 민희진의 기자회견 이후 유탄을 맞은 건 사태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타 레이블 아이돌이었다. 뉴진스 멤버들을 말하며 눈물을 쏟다가 사쿠라 이름을 이를 갈면서 부르짖는 광경은 호러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보는 것 같았다. 민희진이 방시혁과 박지원에게 삿대질을 한 건 분명 통쾌한 장관이었겠으나, 본인 말마따나 "죄 없는" 아이돌을 향해 증오의 폐수를 흘려보내는 것이 너무나 쉽게 없는 일처럼 넘어가 버리는 건 기자 회견에 환호하는 사람들의 문제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하이브 측에 이걸 비판할 자격 같은 건 없다. 그들은 기자회견 다음 날 쏘스 뮤직 명의로 민희진을 겨냥해 아티스트 실명 언급을 멈추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하이브 명의 입장문에는 르세라핌 멤버 사쿠라의 ‘실명’이 보란 듯이 적혀 있었다. 도대체가 이 자들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해당 아이돌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임원 간 분쟁의 민감한 맥락에서 거론하는 건 아이돌을 하이브를 향한 비난 세례 앞에 세워서 과녁을 분산하는 짓거리다. 가수를 보호해야 할 기획사가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며, 나는 다른 대형 기획사가 이런 행동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하이브란 신흥 대기업 집단에 부재한 것, 현 사태를 부른 건 바로 가치의 결핍이다. 사업과 사람에 대한 책임감, 인간의 존엄에 대한 존중이다. 하이브는 오래전부터 테크 기업으로 전환하려는 욕망을 쫓아 구조를 조정해 왔지만, 그들이 ‘상품’으로 맡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여론이 하이브에서 민희진에게 급격히 기울어 버린 이유 하나도 그거다. 어찌되었건 민희진과 뉴진스에게선 인간과 인간의 끈끈한 유대감이 보이지만 하이브에게선 사람을 쓰다 버리는 비천함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이브의 입장문 6번 항목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스스로 입증한 결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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