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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Dec 12. 2015

비평의 몰락?

듀나와 정성일의 '논쟁'


트위터를 보니 며칠 전 듀나와 정성일 사이에 간접적 말다툼이 있었던 것 같다. 이른바 ‘비평의 몰락’에 관한 자존심 싸움인데…


저는 비평가라는 이름을 단 사람이 영화를 보자마자 즉각 나와서 자기 트위터에다 본 영화평 올리는 건 자판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비평가입니까? 자기가 감히 영화를 보자마자 비평을 쓸 수 있다고? - 정성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오픈 토크 중에서      

RT) 글쎄요. 전 정성일 씨가 말하는 비평과 당일 올라가는 인상 리뷰는 전혀 다른 작업이라고 생각해서. 두 종류의 작업은 영화가 태어났을 때부터 공존해왔어요. 당일 140자로 올라가는 인상 리뷰가 있다고 해서 전자의 작업이 침범당하는 건 아니죠.  - 듀나, 트위터     


둘은 각각 서로가 공격하고 방어하는 ‘트위터 리뷰’와 ‘정식 비평’을 쓰며 입지를 구축한 사람들이고, 그 두 분야를 어느 정도 대표하는 입장이다. 그 점에 주목한다면 이 짧은 입씨름에서 좀 더 흥미로운 행간을 읽을 수 있다.


내가 ‘비평의 몰락’이란 명제에 동의하는 대목이 있다면, 비평의 위상의 전도다. 비평의 질적 퇴보와 같으면서 다른 말인데, 제대로 된 비평이 사라졌다고들 하지만 『키노』가 재정난으로 폐간한 것이 10년 전이란 걸 떠올리면 어느 정도 새삼스러운 얘기다. 영화 저널은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중반 울창했다 이윽고 저물어갔고 『씨네21』 하나만 살아남았다. 그러나 『무비위크』 같은 잡지에 과연 정식 장평을 싣는 지면이 있었는지 상기해 봐도 좋다. 저가의 영화 주간지가 그만큼 난립했던 것이야말로 조금 이상한 현상일지 모른다.


영화 글쟁이들이 트위터에 시사회 후기를 올리면서 자신이 비평을 쓴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다. 개봉을 앞둔 영화에 대한 소감을 나름의 권위와 감식안을 담보로 미리 소개하는 것도 관람산업에서 필요한 정보다. “그런 것은 비평이라 부를 가치도 없다”는 투의 정성일의 단언은 경직된 시각이다. 다만, 문제는 영화 글을 유통하는 시장에서 (트위터 리뷰로 대변될 수 있는)리뷰형 인상비평이 획일적 지위를 차지하고, 전통적 의미의 비평이 소외된 자리를 잠식했다는 거다. 이건 “작업이 침범”당한다는 것과 다른 차원의 사태다. ‘리뷰와 비평이 공존하는 게 왜 나쁘냐’는 듀나의 응수는 논점 일탈이거나 현실 호도다. 또 다른 의문은 독자들 인식 속에서 리뷰와 비평작업의 성격이 과연 구분되고 있냐는 거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대중에게, 10년 전 최고의 비평가가 정성일이었다면, 10년 후 최고의 비평가는 이동진이다.


나는 그 변화를 비난하자는 게 아니다. 요점은 이제 영화 담론은 독자적 생태계를 구성하지 못한다는 거다. 예전에도 함량 미달의 비평가는 많았지만 이창동의 <오아시스>를 둘러싸고, 김기덕의 <나쁜 남자>의 반여성주의에 대해 영화비평 네트워크 안에서 벌어진 격론이 그 밖으로 확장되던 상황은 두 번 다시 재연되지 못할 것이다. 비평가들은 담론을 생산하고 기록하는 저널 지면에서 퇴거한 채, GV로 강연장으로 팟캐스트로 일회적 담화의 장소로 입주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적 가치를 평가하는 담론이 무력화된 자리를,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에게 관람 가치를 평가해주는 소비자 담론이 차지했다. 또는 스크린 독과점 및 영화산업 고도화에 따른 천만 영화 범람과 함께 거대흥행의 원인을 영화 바깥에서 꿰맞추거나, 영화산업 거래질서를 도덕주의로 성토하는 사회 담론이 차지했다. 그 밖에서 살아남은 영화 담론이란 대개 ‘스펙타클의 담론’이다.


끝없이 배태되는 천만 영화의 예감과 함께, 관객 수 전산 집계를 중계하며 환호하고, 아니면 냉소하고 경멸하며 문화적 자존감과 시네필적 취향을 과시하는 지금, 한 줌의 영화 담론은 천만 영화 OX 퀴즈로 수렴하는 중이다.


지금도 읽으려고만 하면 괜찮은 비평을 접할 수 있다. 『씨네21』 「신전영객잔」도 좋고, 『KMDB』에 실리는 영화 글도 좋다. 나는 그것들이 담론을 이루지 못한 채 고립되거나 위축돼있고 흩어져 있다고 말하는 중이다. (201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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