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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Dec 13. 2015

반지성주의가 부른 참극

평론가 김도훈의 '한국적 무협은 없다'

한국적 무협은 없다

링크한 글의 필자 김도훈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협녀 : 칼의 기억>을 평가한다. 1) 한국적 무협이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거나 계승할 역사적 가치가 없다. 2) <협녀>는 다양한 해외 무협 영화의 클리셰를 차용한 영화다. 3) 한국적 무협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는 약점이 아니다. 4) 한국적 장르영화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하기 힘들다. 5) 한국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나, 장르적 관습의 재현(김도훈의 표현을 빌면 ‘뻥’)을 제약하는 족쇄이고, 그 점을 돌파한 과감함이 <협녀>의 장점이다. 6) 더 많은 영화가 해외 영화의 ‘뻥을 베끼며’ 관객의 인식 기준을 갱신해야 한다.


김도훈의 칼럼이 발행될 때 <협녀>는 개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별다른 되먹임도 제기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김도훈은 “<협녀>가 한국적 무협의 자존심을 잃었다”는 가상의 비판을 상정해놓고 열심히 무찌르는 수상쩍은 광경을 연출한다. 정작 <협녀>를 ‘한국적 무협’이라 일컬은 것은 홍보성 소개 기사가 다수라는 점에서, 김도훈이 맞서 싸우려는 논적이 누구인지 오리무중에 빠진다. (이런 분열적 논조를 수습하는 유일한 길은 ‘한국적 무협’이란 홍보 문구가 실망스럽더라는 예상 가능한 비판을 사전 봉쇄하며 영화를 비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만약 <협녀>가 해외 무협영화의 장면들을 많은 부분 빌려온 게 사실이라면, 논점은 한국적 무협영화의 자존심이 아니라 개별 영화의 오리지널리티다. 가령 <베를린> 표절 논란이 일었을 때 영화의 개성과 창작 윤리가 지적당했지, ‘한국 첩보 액션의 자존심을 잃었다’고 비판한 사람은 없었다. 김도훈이 한국적 무협은 전승할 가치가 없다고 아무리 강변해봤자, <협녀>를 향해 제기될 수 있는 유의미한 비판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는다. 가히 ‘쉐도우 복싱’이라 할 만하다. 이 또한 허구적 논점을 상정하고 스스로 반박하며 영화를 방어하는 뒤틀린 논리구조에서 생기는 사태다.


이 밖에도 김도훈의 글은 “질이 낮은 건 그냥 질이 낮은 것이다. 질이 낮은 것이 우리 것이라고 해서 역사적인 무언가가 되지는 않는다”같은 흑백논리, “<와호장룡> 이후 등장한 세상의 모든 무협영화는 <와호장룡>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니까”, “한국적인 장르영화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한 가지 반례만 제시해도 무너지는 모래성 같은 형국으로 세워져 있다. <협녀>가 타란티노의 <킬빌>의 장면을  차용했다,라고 서술하면 될 것을 “박흥식 감독은 찬바라 영화에 오마주를 바친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을 다시 오마주 하는 이중의 오마주를 보여준다”라고 거창하게 의미 부여하는 이유도 궁금하다. 글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한국적인 것’(전통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클리셰’와 ‘영화적 뻥’이라는 서로 다른 개념이 스리슬쩍  바통터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국 뻥, 일본 뻥, 할리우드 뻥을 부끄러움 없이 모조리 베껴와 대담하게 펼치는 한국적 뻥의 세계를 보고 싶다”라는 무리한 결론을 포기했더라면 개념을 오용할 가능성도 그만큼 줄었을 것이다.


한편 김도훈은 잘못된 논거를 가져온다. “한국 장르영화의 장점은 어디선가 이미 존재하는 장르의 클리셰들을 모조리 가져와 거침없이 달려갈 때 발휘된다.”라는 의심스러운 단언 후에 “봉준호의 <괴물>과 김지운의 <놈, 놈, 놈> 같은 놀라운 작품들이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라고 부연한다. 물론 <괴물>은 기존 괴수 영화의 관습적 설정 위에 지어진 작품이다. 환경오염에 의한 괴수의 탄생 연원이나, 그 탄생 연원이 정치적 사건과 과학문명의 병폐를 암시한다는 점도 <고질라>․ <엘리게이터> 같은 장르의 고전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괴물>의 초점은 그 이상으로 장르의 관습을 일탈하는데 모아져 있으며, 정작 흥미로운 것도 그 대목이다.


<괴물>은 괴물이 얼마나 가공스럽고 흉포한지 전시하며 스펙터클과 서스펜스를 뽑아내는 영화가 아니다. <괴물>처럼 러닝타임 초반에 괴수를 본격 등판하며 자신의 패를 까발리는 괴수 영화는 드물다. 한바탕 살육전을 통한 장르적 쾌감 또한 사실상 그 대낮 한강둔치 습격 장면이 마지막이다. 오히려 러닝타임의 더 많은 시간 동안 괴물은 주변화되고, ‘에이전트 옐로우’와 정체 불상의 바이러스를 둘러싼 사회적 부조리극이 중심을 차지한다. 이는 괴물이 장르적  대상보다는 주제의식의 표상으로 기능함을 가리킨다. <괴물>처럼 블랙 코미디의 호흡으로 진행되는 괴수영화가 드물 것이란 점도 말할 나위 없다. 더 많은 반례를 들 수 있으나 한 가지만 되묻자. 한강 둔덕을 올라가다 굴러 떨어지며 슬랩스틱을 연출하는 괴물은 어떤 괴수영화의 클리셰인가? <괴물>은 이렇듯 장르의 관습을 뒤틀면서, 한국적 재현을 도모하거나 지역 정치학의 주제의식과 교직 하는 영화다. 감독 봉준호 또한 여러 자리에서 누차 이러한 ‘할리우드와의 거리두기’를 밝힌 바 있다. 정성일과 허문영, 김소영, 듀나 등 숱한 평자들 또한 이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봉준호의 필모그래피가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지역적 전유의 역사라는 것은 작가와 평자들 사이 만장일치로 합의된 ‘상식’에 가깝다. 김도훈의 주장은 아연할 만큼 근거가 미심쩍은 것이다.


이 대목은 4), 5)와 결부돼 있는데 논점을 발전시킬 가치가 있다. 한국영화가 장르영화를 재현하기 유리한 조건을 지니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할리우드와의 제작비 규모 차이 때문이고, 장르 서사의 배경이 되는 지역적 현실의 차이 때문이다. 나아가서, 서사는 자신이 기반을 둔 물적 토대에 빗대어 설득력을 얻는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서사가 허구일지라도 서사의 향유자들은 현실세계의 경험과 인식을 바탕으로 허구에 반응하고 그를 평가하기 마련이다. 특정 지역을 무대로 한 서사라면 그 지역의 현실적 상황이 ‘개연성’ 구실을 한다는 말이다. 가령 한국처럼 좁아터진 땅 덩어리에서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대서사시가 펼쳐진다면 아무래도 공감 가지 않을 것이다. 우주 공학의 기수 미국에는 ‘NASA'가 있으니 태양계 밖으로 날아가 외계인과 조우하지만, 인공위성 하나 겨우 쏘아 올리는 한국에서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가 제작된다면 승복하기 힘들 것이다. 이것을 장르적 ‘도상’ (ICON)이란 개념으로 압축할 수 있다.


도상은 장르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로서, 의상․ 연기자․ 소품․지역․ 건물 등 장르의 고유성을 담지한다. 누아르 영화는 ‘마피아’와  ‘팜므파탈’, ‘시가'와 ‘보스의 집무실’로 짜인다. 히어로 영화는 ‘초인’․ ‘헤로인’․ ‘유니폼’, 서부극은 ‘보안관’․ ‘무법자’․ ‘인디언’․ ‘열차’․ ‘권총’․ ‘황야’로 엮인다. 영화는 국적을 가진 상품-예술이라, 제작-상영 국가에 따라 장르적 도상도 차이가 난다. 하나의 장르가 타국으로 이사 갈 때, 지역 실정에 맞게 도상이 교체된다. 필름 누아르가 홍콩 누아르로 바뀌면 마피아 대신 흑사회가, 서부극이 만주 웨스턴으로 바뀌면 인디언의 자리에 식민 지배 기구가 들어선다. 즉 할리우드 장르영화를 수혈하는 위치의 한국영화는 할리우드가 지닌 도상의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장르영화를 시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측면도 있다. 한국영화에 ‘조폭 누아르’․ ‘호러 영화’․ ‘로맨스 영화’ 같은 특정 장르영화가 편중된 까닭이기도 하다.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가 공감대와 짜임새를 얻기 위한 보편적 조건이다. 한국적 전통에 얽매이는 것과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장르영화 재현의 지역적 조건은 한국영화의 운신 범위를 묶어두는 한계일 수도 있지만, 그 조건에 맞춰 새로운 방식으로 장르를 재현하는 미학적 기회일 수도 있다. 이런 양면적 상황을 의식하고 영화적으로 타개할 때 <살인의 추억>․ <괴물> 같은 ‘한국적 장르영화’ 걸작이 탄생한다. 실제, 많은 한국 장르영화에는 장르 이식의 제약에 대한 자의식이 묻어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처음으로 도전할 때, 첩보 장르를 끌고 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현실정치의 대립항 북한을 자연스레 장르적 대립항으로 소환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겠는가? 이상의 논점은 최근 몇 년간 관객 파이가 폭증하며 한국영화 제작비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장르영화들이 시도되는 상황에서 피해가기 힘든 고민이다.


“누구는 그랬다. 하도 이 국가에서 벌어지는 현실 자체가 뻥에 가까운 나머지 한국 관객들이 영화적인 뻥을 뻥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한다고.”라는 진단은 문제의 핵심과 동 떨어진 피상적 인상평일 뿐 더러, “하지만 그럴수록 한국영화는 위축되지 않고 막 나가는 뻥의 세계를 관객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라는 대안은 당면한 영화적 고민을 묵살하는 것에 가깝다. “일단 뻥을 더 많이 치면 더 효과적으로 뻥을 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그 전까지는 모두가 더 대담하게 뻥을 쳐야 한다”라는 결론도 그렇다. 한 편의 영화의 개연성과 설득력은 콘텍스트를 반영한 텍스트의 내적 완결성으로 이뤄내야 한다. 그를 관객의 인식전환과 장래의 다른 영화들의 시도로 전가하는 것은 그 영화의 책임을 면책하자는 본말이 뒤집힌 논리다. 평론가의 임무는 영화가 해낸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지, 영화가 해내지 못한 것을  대신해달라고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김도훈은 “박흥식의 <협녀>는 중국과 일본 무협의 모든 클리셰를 부끄러움 없이 다 가져와 터뜨린다 … 나는 중국 뻥, 일본 뻥, 할리우드 뻥을 부끄러움 없이 모조리 베껴와 대담하게 펼치는 한국적 뻥의 세계를 보고 싶다”라고 희망사항을 피력하며 <협녀>를 호평한다. 그러나 그 자체를 미학화하거나 영화적으로 기획하지 않는 한, 어떤 영화가 다른 영화들을 노골적으로 흉내 낸다는 사실이 어떻게 봐도 장점일 수는 없다. 저러한 흉내내기에서 <협녀>가 특별히 새로운 것도 아니다. <신세계>, <군도> 같은 익숙한 전례가 있을 뿐 아니라, 2012년  경부터 한국영화의 트렌드 하나는 성공한 해외 장르물․ 서사물을 베껴오며 흥행 안정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상업영화의 창의성 소실, 작가적 개성의 멸실이다. 김도훈의 웅변은 부조리하다.


김도훈은 허구적 논점을 상정하고 흑백논리와 잘못된 근거, 우격다짐식 논변을 발판 삼아 도착적 결론으로 도움닫기 한다. 평소 공적․ 사적 지면을 가리지 않고, 이론 중심의 영화 비평에 일관된 적개심을 표출해 온 김도훈의 반지성주의가 부른 필연적 참극으로 보인다. 언젠가부터 재치 있는 수사와 필자의 캐릭터, 단순 명쾌한 제스처로 엄밀한 논증과 기술적 분석을 대치한 리뷰형 영화 글이 전통적 영화비평의 영토를 잠식하고 있다. 이들 중 몇몇은 스스로에게 비평가의 기풍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영화에 관해 분별없이 과감한 단언을 토하거나, 독자와 다른 평자들을 향해 인정투쟁을 벌이길 서슴지 않는다. 김도훈의 “한국적 무협은 없다”는 이런 비평 지형의 증상이 돌출한 환부라고 한다면 과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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