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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May 10. 2016

이동진이라는 대명사

이동진이란 이름은 대명사다. 그는 평론가 개인을 칭하는 고유명사를 넘어 영화평론을 대표하는 대명사가 됐다. 올 초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의 누적 방문자는 4000만 명을 넘었다. 블로그에 올라오는 개봉 영화 리뷰의 공감 숫자는 수백 개에 이른다. CGV와 함께 진행하는 ‘라이브톡’은 전국 CGV 아트하우스 15~16개관에 생중계된다. 그는 가장 공신력 있는 상업영화 리뷰어요, 예술영화로 향하는 교양 있는 안내자로 사랑받는다. “300석도 2분 만에 매진··· ‘이동진 현상’ 왜?”라는 스펙터클한 기사 표제를 보라.


그는 구설수에도 올랐다. 올 2월에 터진 <캐롤> 라이브톡 논란이 그랬다. <캐롤>은 여성과 여성의 로맨스를 그린 작품인데, ‘여자라서 좋아한 것이 아니라 하필 상대가 여자’라는 요지의 표현이 동성애의 개별성을 보편적 로맨스로 바꿔 치는 것이라 비난받았다. 영화감독 조원희는 한겨레 칼럼 ‘영화도 독점 영화 해설도 독점’에서 이동진이 예술영화 GV를 독과점하는 구조에 항의했다. 특히 이동진은 전자의 비난에 대해 이례적으로 긴 글을 블로그에 올리며 분노에 찬 항변을 했다. 이것도 ‘현상’이 짊어진 숙명일까? 그렇게 치부하기엔 문제는 간단치 않다. 이동진이란 개인을 비판하는 걸 넘어 이동진이란 대명사를 바라봐야 한다.


단언하건대, 이동진은 한국사회 공론장의 표층과 심층을 대표하는 문제적 인물이다. 표층이란 담론이 아니라 담화 중심, 평자의 취향과 신념을 거세한 리뷰 중심의 평론 지형이다. 심층은 대중이 거하는 공론장 전반을 휩쓰는 반지성주의다.


조원희는 이동진이 예술영화 GV를 도맡는다고 불만스러워하지만 지엽적 논점에 불과하다. 그 이전에 왜 영화평론이 GV라는 포맷으로 대체되고 있는지, 의미를 물어야 한다. 단적으로 말하자. GV는 비평의 장소에 위계를 만들고 비평의 장을 형해화하고 있다. 영화를 사랑하는 두 번째 방법은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라는 프랑소와 트뤼포의 말을 경구처럼 인용하는 정성일 평론가 마저 왜 펜을 잡기보다 마이크를 잡겠는가. 원고료는 오래전에 동결됐고 지면 숫자도 줄었으며, GV가 훨씬 유력한 수익모델이기 때문이다. GV는 당연히 지면 비평보다 진입장벽도 높다. 청중이 원하는 건 권위가 인준된 연사다. 자기 지면을 가지는 것이 GV나 방송으로 넘어가기 위해 상징 자본을 축적하는 경유지가 되어가고 있다. 이동진이 몇 년씩 언론에 글을 싣지 않다가 최근 ‘다음’에 리뷰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도 그렇다. 그럴 필요가 없고 시간만 소비하기 때문 아닐까. 허지웅도 JTBC와 커넥션을 쌓은 직후 언론 지면을 반납한 예가 있다.


평론가들이 GV로 몰려가며 담론도 부서져 나간다. 지면 비평은 불특정 다수 독자에게 공개되고 공론장에 색인이 남는다. 담화 비평은 폐쇄된 장소에서 소수의 특정한 청중을 대상으로 발화된 후 사라진다. 비평가들이 쓰는 편지의 수신처는 동료 비평가가 아니라 온전히 관객-청중이다. 담론이 기록될 수 없으며 비평이 서로를 보지 않고 만날 수도 없는데, 어떻게 비평의 장이 존재를 지켜내겠는가.


이동진이 새롭게 개념화할 수 있는 평론가 모델 같은 걸 도출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로저 이버트가 TV 쇼 <시스켈과 이버트>에 나와 네로처럼 엄지를 올리고 내린 게 1975년부터다. 관람 가치의 지표로 환산되는 별점평도 20세기 초에 등장했다. 자신의 상징 자본과 감식안에 대한 권위를 무기로 구매가치를 보증하며 리뷰와 비평의 경계에 선 평론가는 낯익다. 이동진이란 브랜드는 너무 존재감이 커졌고, 그 바깥의 비평 섹터는 너무 무력해졌을 따름이다. 단적으로, 씨네 21 프리뷰를 사보는 관객보다, 이동진이 블로그에 올리는 시사회 후기를 보고 영화를 고르는 관객이 많을 지도 모른다. 만약에, 가치판단을 통해 작품에 개입하는 전통적 비평이 왕성하게 존속하여 상보한다면, 저명한 평론가가 영화를 오도한다거나 평론 기회를 싹쓸이한다는 비판도 일정 부분 근거를 잃는다. 이동진이란 대명사를 둘러싼 진짜 쟁점이다.


한편, 평론가로서 이동진의 뚜렷한 태도는 문화적 상대주의와 가치 중립주의다. 그는 보편적 규범으로 작품을 판단하는 평론가가 아니라, 교양과 지식을 갖춘 ‘또 다른 관객’의 자리에서 만듦새 비평에 치중한다. 몇 년 전 <변호인> 논란, 앞서 말한 <캐롤> 논란처럼 규범적 판단을 요구하는 비판과 부딪히면 상대주의의 참호로 피신한다. 전자에선 ‘나에겐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묵비권을 꺼냈고, 후자에선 ‘내 견해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게 다른 해석들을 제치고 유일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지도 않는다’며 논쟁에 뛰어드는 순간에도 논쟁을 거절했다. 한편으론 완곡한 표현으로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과의 ‘같음’을 강조하며 논쟁 지점을 제거했다.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제 개인적인 견해가 궁금하시다구요? ‘변호인’에 대해 적은 제 글을 읽고도 어떻게 그걸 파악하지 못하실 수가 있나요?” “저는 비판하시는 분들의 (영화를 떠나서) 동성애에 대한 생각과 저 자신의 동성애에 대한 생각이 차이가 거의 없다고 판단합니다.”


영화학자 로빈 우드는 비평가는 열정적으로 특수한 작업에 몰두하며 가치판단에 도달하는 사람이라 말했다. 이런 정의에 동의한다. 리뷰가 영화라는 대상에 대한 기술이라면 비평은 영화라는 타자에 대한 개입이다. 스스로의 주견이 없다면 누군가에 대한 개입도 성립하지 않는다. 상대주의와 가치 중립주의는 규범적 판단을 호출하거나 개진하는 영화를 논할 때 비평가로서 흠결 사유다. 그는 영화에 개입할 때라도 “캐릭터를 학대한다” 같은 연출술에 대한 평가와 결부된 얕은 수준의 윤리적 개입을 한다.


같은 리뷰어 계열의 필자 듀나와 허지웅에 비해 이동진이 대중의 전폭적 사랑을 받는 건 ‘또 다른 관객’이라는 수평적 관계 설정 때문이다. 규범을 상대화하고 만듦새에 대한 인상평, 관람 값어치만 알려주니까 관객들과 부딪힐 이유도 싸울 이유도 없다. 이동진은 관객에게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의 취향을 존중하고, 자신에 대한 담론의 개입도 거절하는 것 같다.


대중이 열광하는 영화를 혹평한 전문가들에 대한 초유의 사이버 테러로 비화된 2007년 <디워> 사태는 “내 위에 서서, 내 취향과 판단을 부정하지 말라”는 대중의 성난 선전포고였다. 평론을 쓸 수 있는 지면은 지식인의 전유물이었지만, 지금은 모두가 영화를 보고 ‘구매후기’를 써서 평론가의 글과 견주어본다. 영화에 관한 팩트적 지식이 인터넷 천지에 넘쳐나니, 비평가의 장황한 가치판단은 ‘먹물의 쓸 데 없는 현학’으로 치부된다. 대중은 날 가르치는 자, 내 취향을 부정하는 자를 증오하는 한편 타자에 대한 개입을 적출한 지성의 겉가죽을 선망한다. 둘을 만족하는 것이 이동진, 대중과 평론가의 성전 <디워> 이후의 세계가 낳은 새로운 스타 평론가다. 취향의 껍질로 저마다를 감싼 채 논쟁을 차단하며 존중을 외치는, 좋고 싫음만 있고 옳고 그름은 없는 세계. 계몽의 시대가 끝나고 ‘취존’의 시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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