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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Aug 03. 2016

혐오를 비난하는 혐오

메갈리아 사태에 관한 메타적 비평

메갈리아는 전선이 되었다. 익명의 네티즌들이 김자연 성우에게 페미니즘과 여성 혐오 반대를 표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메갈리아에 대한 입장을 물으며 촉발된 사태는 사건과 논란을 증식하며 폭주했다. 네티즌과 유명인, 인터넷 커뮤니티와 언론, 기업, 정당까지 거의 모든 사회 주체가 이 문제에 연루됐다. 메갈리아 사태는 우리 사회 구성원에게 저마다의 입장을 요구한다. 메갈리아와 함께 할 수 있는가, 함께 할 수 없는가. 인터넷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반메갈리아 여론은 메갈리아와 절교할 것을 사회에 종용한다. 그것에 불복하는 이들은 반대편에 모이고 있다. 전황은 힘겨루기에 돌입했다. 

          

본격적 논의에 앞서 몇 가지 쟁점을 간단히 짚고 가려한다. 이것들은 사안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근본적 준거점이다. 우선 메갈리아의 성격 규정이다. 한 집단에 어떤 태도를 표명한단 이유로 직업적 불이익을 주는 것을 민주사회 원칙은 허락하지 않는다. 반메갈리아 여론도 이 점을 알기에 메갈리아가 민주사회에서 관용할 수 없는 ‘반사회적 혐오 사이트’라는 레토릭을 걸었다. 나는 이미 이 쟁점에 관해 의견을 개진했다("메갈리아와 낙인찍기", 슬로우뉴스, 2016.07.22.).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명료하게 논증한다(“넥슨 여성운동 탄압사태, 눈치들 보지 마라”, 경향신문, 2016.08.01). ‘혐오’는 차별의 선동이란 정의가 명확하고, 현실의 권력구조 상 남성 혐오는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요지다. 


다음, 메갈리아를 비판하는 일이 곧 ‘여성 혐오’냐는 반문이다. 메갈리아란 사이트를 비판하는 것 자체는 여성 혐오가 아니다. 여성주의를 지지하면서 메갈리아의 방법론에 반대할 수도 있고, 메갈리아를 지지하지 않아도 여성혐오에 반대할 수 있다. 가령 여성 몰카 동영상이 공유되는 소라넷 사이트를 폐쇄한 메갈리아의 성과를 칭찬하면서 미러링이 적절한 투쟁수단이 아니라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메갈리아를 비판하는 걸 넘어 메갈리아의 존재를 배제하는 건 다른 문제다. 그것은 메갈리아가 표방하는 여성주의라는 가치를 외면하고, 그 가치에 걸맞은 실천을 했다는 ‘팩트’까지 부인하는 것이므로 명백한 반여성주의다. 이 점은 명확히 하자.      


이미 메갈리아 사태에 관해 무수한 찬반 의견이 쏟아졌다. 대다수 독자가 나름의 판단을 굳힌 상태일 것이다. 여기서는 비교적 다루어지지 않은 쟁점을 보충하는 방식으로 사안의 의미를 메타적으로 비평하려 한다. 그리고 메갈리아에 관한 나의 입장을 선언하며 글을 마칠 것이다.           



웹 사이트 메갈리아의 현주소          


논의를 시작하기 앞서 정리해야 할 것이 있다. 사안에서 빼놓을 수 없지만, 이상할 만큼 얘기되지 않는 부분이다. 바로 웹 사이트 메갈리아의 현주소다. 모든 말을 빨아 삼키는 태풍의 눈 같은 이름이지만, 사실 메갈리아는 수명이 다 해가는 사이트다. 메갈리아 게시판에는 몇 달째 새로운 글이 별로 올라오지 않고 있다. 하루에 등록되는 게시물 수가 10~20개 수준이다. 작년 12월 경, 동성애자 혐오표현 사용을 두고 논쟁이 벌어진 후 메갈리아는 워마드와 레디즘으로 분화했고, 메갈리아에 남은 활동 유저는 거의 없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허수아비를 가운데 놓고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메갈리아의 소행이라 회자되는 것 상당수는 소수자 혐오 표현을 고수하는 과격한 유저들이 넘어간 워마드의 행각이다. 가령 동성애자 아웃팅 모의와 최근 논란이 된 ‘부동액 살인 게시물’이 그렇다.  


이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선 김자연 성우가 후원한 페이스북 페이지 ‘메갈리아 4’가 현재 메갈리아와 연계활동이 없는 독립적 페이지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 반론할 수 없게 된다(메갈리아 4는 워마드에서 아우팅 모의가 일어났을 때 비판하는 공식 논평을 게시한 적도 있다). 또한 찬반 여론이 메갈리아의 현 상태를 정작 잘 알지 못하거나, 메갈리아란 이름에 일개 웹 사이트를 넘는 상징적 존재감을 은연중에 부여함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웹 사이트 메갈리아의 수명이 다 해간다는 사실은, 당면한 논란의 향배를 떠나 ‘메갈리아 이후’를 고민하기 위해 반드시 공유되어야 한다. 많은 회원 수로 여성 혐오 이슈에 왕성하게 나서지만 소수자 혐오 성향이 짙은 워마드에 어떤 입장을 취할지, 메갈리아가 남긴 유산과 부채는 무엇인지, 메갈리아란 이름을 어떻게 상징화할 것이며, 그들의 족적을 어떤 노선으로 이어 갈지 사회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다.                



구매력 논리와 정치의 실패    


메갈리아 사태는 서브 컬처 업계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김자연 성우와 넥슨이 계약을 해지한 후, 일련의 사건이 있었고 ‘독자를 존중하지 않는 업계는 검열에 직면해도 싸다’는 예스컷 운동이 웹툰계를 횡행했다. 메갈리아에 관용적 태도를 취하거나 반메갈리아 여론을 비판하는 유명인들에게 비난이 쇄도했고, 여론은 그들이 소속된 업체에 집단 항의와 회원 탈퇴로 압박을 가했다. 그 결과 몇몇은 입장을 철회했고, 웹툰 업체가 소속 작가들에게 ‘입조심’을 종용하는 메일을 보냈으며, 웹툰 산업 협회 회장이라는 인물은 “메갈리아 유저와 같이 일할 수 없다”라고 선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렇듯 남성향 콘텐츠를 즐기는 유저들은 ‘구매력’을 사용해 무차별 압력을 밀어 넣고 있는데, 특기할만한 건 이들의 자기방어 논리다.     


“너희도 똑같이 하지 않았었냐.” 그동안 여성 혐오 표현을 한 유명인, 여성 혐오 콘텐츠를 파는 기업을 상대로 벌어진 소비자 운동을 꼬집는 말이다. 이런 ‘눈눈이이’ 논리가 정당하지 않다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개인 차원에서 어떤 상품 혹은 회사의 무언가가 마음에 차지 않아 거래하지 않는 건 이유가 필요 없다. 이거야말로 자기 ‘기분’에 달린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여론을 규합하고 불매운동을 벌이며 작위의 타격을 가한다면 기준이 필요하다. 소비자 운동은 달리 말해 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인데, 그에 응당한 사회적 명분이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합의할 만한 선에서 꼽아 보자면, 소비자의 집단적 이익이 걸려있거나 기업이 사회적 가치를 저해하는 경우가 있겠다. 전자의 경우 하자 있는 상품에 대한 리콜 요구, 후자의 경우 ‘갑질’ 논란을 일으킨 남양유업, 미스터피자에 대한 보이콧이다.  


반여성혐오 소비자 운동에는 사회적 가치란 명분이 있었다. 공개적으로 여성 혐오 표현을 한 기업과 유명인은 해외에서도 퇴출 요구에 직면한다. 물론 개별 사례가 그 기준에 엄밀히 부합했는가, 비례 형량이 무너지지 않았는가 토론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남성향 콘텐츠에서 벌어지는 ‘소비자 운동’은 일체의 토론이 불가능하다. 아무런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단체의 티셔츠를 사 입었다는 사실, SNS에서 소비자를 자처하는 익명의 인물들과 시비가 붙었다는 사실, 그래서 소비자가 ‘반감’을 품었다는 사실은 사회적 명분이 되기엔 사소하기 짝이 없고 너무나 사적이다. 메갈리아에 관한 입장 표명을 이유로 직업 활동을 중단시키려는 것도 직업 활동의 권리를 위태롭게 만든다. 공익을 위한 소비자운동이 아니라 공익을 말아 먹는 소비자운동이다.           


이렇듯 구매력을 ‘힘’으로 환전하고 무한정 정당화하는 태도는 병적이다. 다만, 이런 ‘구매력 논리’가 사회의 깊은 환부에서 배출된 것임은 성찰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큰 트렌드는 명예훼손 고소의 성행과 구매력을 무기로 쓰는 소비자 운동의 팽창이다. 메갈리아의 소비자 운동은 여성 인권이라는 명분을 쥐고 있었지만, 그 명분보다 여성들이 보유한 구매력 자체가 강조되는 순간이 있었다. 한 기사 표제로 채택되기도 한 “돈 쓰는 사람이 누군지 알라고”라는 구호는 징후적이었다. 여성 혐오 스캔들 대다수가 대중문화에서 발발한 것도 여성 소비자가 밀집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에 대항하여 공익을 구현할 수 있는 통로가 ‘시장’이었고, 의지할 것은 ‘구매력’이란 자력구제의 수단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이 점은 소비자라는 정체성이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압도하고, 시장 외의 공적 영역이 허약한 사회 현실을 암시한다. 게임·웹툰 업체를 압박한 것과 똑같은 양태, 똑같은 맥락으로 정의당 당원들이 집단 탈당을 엄포해 당 지도부가 성명을 철회한 것은 소비자 논리가 공당마저 잠식한 충격적 사례다.           


명예훼손 고소의 성행 역시 마찬가지다. ‘내 명예를 보호할 권리’가 이토록 광범위하게 보급된 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자력구제 시대가 열렸다는 개회 선포다. 웹툰 업계에 몰아친 ‘소비자 운동’ 광풍에 뒤이어 악플을 쓴 유저들을 웹툰 작가들이 대거 고소한다는 뉴스가 그에 대항하듯 도착한 건 시대의 풍경을 그린 추상화 같았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를 매개할 공동체와 정치가 전몰해가는 노을빛 풍경이다. 이 사회적 아수라장 속에 정당의 존재감은 공란이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원내 3당은 사태에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정의당은 거듭되는 입장 번복으로 줏대를 잃고 휘청거렸다. 메갈리아로 돌아가자면, 특정 이념 노선을 지향하는 온라인 운동이 이만큼 왕성한 존재감을 남긴 사례는 정말 드물 것이다. 이들은 사안마다 오프라인으로 뛰쳐나왔고 명시적 성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어떤 정치집단도 이들이 일으킨 바람을 받아 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했다. 워마드와 레디즘으로 분화된 후 이제는 활동이 정지된 일개 인터넷 사이트가 무려 1년 동안 논란의 중심에 선 현실은 여성의제 과소대표와 대의정치 실패를 참혹하게 폭로한다.     



왜 진보적 남자들이 메갈리아를 미워하는가  


반메갈리아 여론은 메갈리아를 ‘반사회적 혐오 사이트’라 호명하며 밀어내는 데 전력투구 한다. 특이한 점은 반메갈리아 여론의 주축이 ‘삼일한’ ‘김치녀’ 같은 적나라한 혐오 표현을 배설하는 일베가 아닌, 일베와 불구대천 원수인 야권 성향 남초 커뮤니티라는 거다. 설왕설래에도 불구하고, 메갈리아가 페미니즘에 걸맞은 실천을 다수 해왔다는 사실은 ‘팩트 폭격’이다. 성차별에 대항하는 노력을 지지하는 건 진보적 태도의 기본이다. 그런데 왜 진보를 지지하는 이들이 자신의 이념을 배반하는 걸까. 가장 쉬운 대답은 저들이 사회경제적으로는 진보주의자지만 정치문화적으로는 보수주의자이며, 사회에 구조화된 불평등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왜 메갈리아를 미워하는지, 좀 더 세밀하게 해부하며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우선 메갈리아가 한국 남자를 비하하기 때문이다. ‘한남충’ ‘실좆’ 같은 조어 말이다. 남성들은 주먹을 쥔 상태에서 엄지와 검지를 나란히 펼친 모양의 메갈리아 트레이드마크가 한국 남자 성기 사이즈를 폄하한다며 화를 낸다. 반대로 남초 커뮤니티에선 '된장녀' 같은 표현이 유행했고,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언사가 빈번하고, 한국 여자 가슴은 ‘절벽’이라는 풍자가 넘쳐난다. 그렇다고 자신들을 반사회적 사이트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이 불평등한 담론지형은 남성들이 ‘반사회적 사이트’ 메갈리아로부터 보호하려는 '사회적 가치'가 가부장 질서임을 암시한다.          


다음은 메갈리아가 일베와 같은 말버릇을 쓴다는 점이다. 메갈리아는 일베를 미러링 했지만, 진보 커뮤니티 안에서 일베는 반사회적 사이트라는 인식이 불변의 진실이므로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거부반응이다. 여기서 일베에 대한 진보진영의 일관된 대응논리였던 ‘타자화’와 ‘낙인찍기’가 초래한 부작용을 알 수 있다. 낙인의 논리가 위험한 건 무언가를 배제한단 사실이 아니다. 무엇을 왜 배제해야 하는지 질문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낙인찍기는 재론의 여지없는 절대악을 배출한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무엇이 악인지 사유하지 않는 상투적 정의감, 악의 평범성을 사산한다. 이렇게 배출된 절대악은 대상이 아닌 표상이다. 낙인을 붙인 대상에 빗대는 것만으로 다른 대상을 퇴출하는 낙인찍기의 연쇄작용이 일어난다. 보편자에게 타자로 인식되는, 사회의 편견에 노출된 소수자일수록 낙인의 표적이 되기 쉽다. 소수가 다수에게 낙인을 찍을 수는 없다. 정의로운 낙인은 꼭 대가를 지불한다. 일베를 왜 추방하는지 토론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낱장의 유사성으로 메갈리아를 일베에 빗대 추방하려는 건 예정된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메갈리아가 인의 도덕을 월장한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메갈리아는 도덕적 통념을 필요 이상으로 모욕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령 ‘한남충들이 위안부 문제에 열 내는 건 자기들이 학대할 여자를 외국 놈에게 뺏겼기 때문’이라는 게시물은 훨씬 정제된 방식으로 취지를 풀어낼 수 있다. ‘애비충’ 같은 말도 가족주의에 익숙한 많은 사람은 아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집단적 도덕관념은 그만큼 공유하는 사람이 많고 기반이 단단해서 하나의 극단적 사례를 보여주는 것으로 상대를 주변화할 수 있다. 메갈리아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며 반대 여론과 논쟁해온 사람으로서, 메갈리아가 너무 옹호하기 까다로운 방식으로 운동을 한다고 느낀 것도 이런 대목이다. 하지만 이런 도덕관념이 사회적 가치와 꼭 포개지진 않음에 유의해야 한다. 나는 '애비충'이란 비속어로 사람들 앞에서 가족을 욕하는 사람과 사적으로 엮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사회적 차원에서 배제하는 건 다른 문제다. 일베가 고인 드립에 패드립이나 하는 사이트였다면 일베 유저를 KBS 기자 같은 공직에서 탈락시킬 결정적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걸 구분하는 데 진통을 겪는 건 한국이 공과 사를 분간하는 데 뻣뻣하고 도덕이 정치를 압도하는 사회란 뜻이다.          


생각하건대 메갈리아는 계륵 같은 면모가 있다. 만약 메갈리아 보다 온건한 제스처로 더 왕성하게 대중운동을 이끄는 플랫폼이 있었다면 여성주의 진영에서도 메갈리아에 훨씬 유연한 태도를 가져갔을 것이다. 메갈리아가 여성 혐오 논란의 최전선이 된 또 다른 이유다. 반메갈리아 여론은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과도한 당파적 논리를 취하지 말라고 상대를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뒤집으면 그만큼 한국사회에 페미니즘이 과소했다는 뜻이다. 반메갈리아 여론은 메갈리아를 배제하는 데 사활을 걺으로써 현실에서 페미니즘을 과소한 자리로 역진시키려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가해자라고 불리길 거부하는 남자들    


MB 정부 이후 십여 년 간 진보담론은 절대 악에 대한 대항 서사와 2030 세대를 피해자로 호명하는 세대론의 두 축으로 조직됐다. 그것이 집약된 것이 2012년 총선 이전까지 선거를 야당의 승리로 이끈 2030 유권자 동원 전략이다.


세대론은 실업난과 저임금에 직면한 젊은 세대 현실을 의제화했단 의의가 있지만 여러 측면에서 비판받았다. 청년층보다 고령층의 빈곤이 심하다거나, 세대 내부에도 계층이 있다거나, 정작 이 담론을 고학력 중산층 청년이 소비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한편 세대란 단일 범주로는 교차적 권력관계를 담기 힘들 것인데 젠더 문제도 거기 속한다. 가령 88만원 세대라고 할 때, 남자 취준생과 여자 취준생의 입장이 얼마나 구분되었고, 젊은 여성이 겪는 특수한 고용차별이 충분히 조명되었는지 물어볼 수 있다.


세대론의 대유행을 개시한 도서 '88만원 세대'의 표지 그림은 한 젊은 남자의 풀 샷이다. 그는 품 큰 양복을 입고 서류 가방을 쥐고 선 채 맥없이 땅을 쳐다본다. 이건 상징적 이미지다. 세대론이 호명하는 '피해자'엔 고개 숙인 취준생, 윗세대처럼 직장과 내 집을 갖고 가정을 꾸리는 사회화에 실패한 '예비 가부장'의 이미지가 깃들어 있었다. 물론 인상평 수준의 논의다. 그러나 현재 2030 남성들만큼 ‘약자/피해자라는 사회적 호명’을 집중적으로 세례 받은 세대는 없다. 그만큼 진보 진영의 세대론은 젊은 세대 현실을 비극적으로 쥐어짜며 연민의 논조로 기성세대에 죄의식을 요구하는 면이 있었다.  


야권 성향 젊은 남성들이 사회를 인식하는 방식은 ‘헬조선’을 만든 절대 악(새누리/친일독재 잔당/TK·고령층 유권자·미개한 국민-타자)을 상정하고 사회의 피해자로서 자조하는 것이다. 권력관계를 선과 악으로 단순화하고, 악의 맞은편에 있단 사실 만으로 선함을 자부하며, 피해자라는 자기 연민에 파묻힌 이들은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상상하지 못한다. 절대 악과 절대 선으로 나뉘는 세계 속에서 가해자로 분류되는 건, 피해자로서 누리던 도덕적 정당성과 담론적 지위를 깡그리 잃고, 내가 부정하던 그들과 내가 같다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다. 여성이 약자라면 강자가 있고, 여성이 차별 구조 속에 피해자라면 그 구조의 촉수로 행동하는 가해자가 존재한다. 남성이 그것을 자각하는 건 가부장 인습의 수행자요, 성차별 제도의 수혜자로서 구조를 바꾸는 책임을 지는 값진 윤리적 실천이다. 내 존재가 타락했다고 폐기하는 일이 아니다. 이 ‘강자/가해자’의 자리를 삭제해버리니까 이항대립이 무너지며 여성이 약자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진다. 얼마 전 정의당 게시판에 한 청년 당원이 써서 화제가 된 글이 있다. '연애도 돈벌이도 넉넉하게 해보지 못한 우리는 사회가 만든 가련한 피해자다. 왜 윗세대가 만든 성차별 사회의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려 하느냐'는 항변이었다. 청년세대를 피해자로 과잉 호명하며 담론을 조직해 온 세대론의 반작용을 이보다 자의식 넘치게 재현할 수 있을까.


한국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제도적 돌봄이 부실한 나라다. 그런 만큼 스스로 약자임을 입증하고 호소함으로써 여론과 담론의 후원을 등에 업고 국가에 제도적 특단을 요구하는 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다르게 요약하면, 메갈리아 사태는 10년 간 무대 위에 있던 ‘세대론/헬조선’에서 ‘여성주의/반여성혐오’로 진보진영의 담론이 교체되는 순간이다. 차후의 담론을 이끌고 수혜를 입을 사회적 주체를 가리는 힘겨루기, 공인된 '피해자'의 지위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이라 할 수 있다.


‘가해자로서의 감수성 부재’는 여성 혐오 의제를 특정 국면에서 굴절시키는 요인이다. 삶의 어떤 단락에선 자신이 힘을 가진 가해자일 수 있다고 상상하고 인정할 줄 아는 능력은 사회 구성원 저마다가 배양해야 할 과제다. 이는 메갈리아 진영에도 시사점을 준다. 강자와 약자는 교차적으로 얽힌 상대적 개념이다. 메갈리아에선 성소수자 혐오 표현으로 논란이 있었고, 워마드에선 성소수자 및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이 흘러넘친다. 또한 한국 남성을 ‘한남충’이라고 악마화/타자화 하는 건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를 떠나 세상을 선과 악, 절대적 가해자와 절대적 피해자의 양 극으로 분리하여 권력관계의 교차성과 유동성을 간과하게 할 수 있다. 피해자, 약자라는 정체성을 운동의 핵심 동력으로 불 태워 온 메갈리아 또한 이 점을 성찰할 이유가 있다.

                    


공론장을 만들기 위한 조건          


미러링의 의의는 뭘까. 내면의 여성 혐오를 꼬집어 보여주며 남성들을 부끄럽게 하는 거? 그렇지 않다는 건 현실을 보면 명확하다. 여성들이 찬 ‘코르셋’(가부장주의 인습)을 깨닫게 하고 서로를 계몽했다는 의의는 있겠다. 내가 볼 땐 그것도 부차적이다.          


미러링의 가장 큰 의의는 젠더 이슈를 사회의 갈등축에 올려놓고, 혐오란 키워드를 첨예하게 부상시켰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여성 혐오와 성차별이 뿌리 뽑힌 적 없다는 사실에 어지간하면 동의할 거다. 그러나 젠더 이슈는 늘 은폐돼있고 부차적이며 보이지 않는 갈등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첨예한 갈등축은 진보와 보수였고, 재벌과 노동으로 호명되었고, 지역갈등으로 전치되었다. 사람들은 '남녀 갈등'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얘기하고 극단으로 치닫는다며 개탄스러워하지만 진실의 한 면만 본 것이다. 갈등은 정치의 시작이며, 정치는 갈등을 다루며 성립한다. 미러링은 남녀문제를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로 공인한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    

 

이것은 가부장 인습을 패러디하여 상대를 도발하는 것은 물론, 피아의 전선을 첨예하게 긋는 미러링의 속성 덕분이다. 미러링은 남용될 한계를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미러링의 타깃과 진의가 발화자의 부연에 따라 규정되는 이현령비현령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상대편'은 미러링을 최대한 악의로 해석할 소지가 있으며, '우리 편'은 미러링을 최대한 선의로 옹호할 동기가 있다는 뜻이다. '나쁜 혐오'에 맞서 '좋은 혐오'가 출현했을 때, '관전자'들은 혐오와 혐오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받는다. 가령 페이스북 코리아는 김치녀 페이지는 놓아두고 메갈리아 페이지만 삭제하는 '선택'을 내렸다. 기울어진 사회의 젠더 권력지형이 폭로된 것이다. 미러링을 경유한 메갈리아에 관한 논쟁은 청군과 백군이 예비 전력 없이 동원되어 줄다리기를 하는 형세에 비유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미러링의 좋은 점이면서 나쁜 점이다. 이슈를 둘러싼 중간지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러링은 의의가 분명하지만, 한계와 시효도 명확한 전략이다. 혹자들이 말하듯, 반격의 꼬투리를 주고 소수자를 향한 빗나간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결과 배제만으로 이뤄지는 정치는 없다. 현실에서 이념이 승리하려면 더 많은 동지를 포섭하고, 요구사항을 조율하기 위한 거점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진영과 진영 사이, 총성과 포성이 소거된 중간지대다. 남녀 유권자 수는 50대 50이다. 한쪽을 편드는 순간 나머지 전부를 잃을 수 있다. 당면한 현안에 제도정치와 시민사회가 개입할 유인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적대가 헐거운 중간지대를 마련해주는 게 좋다. 소라넷 폐쇄와 맥심 전량 회수처럼, 메갈리아 운동이 성과를 내며 흐름을 주도하던 때, 미러링을 폐기하고 다른 전략으로 이행하는 것이 가장 승리적인 전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사 체계와 조직계통이 없는 온라인 운동의 특성상 이런 전략적 결단은 이뤄지기 어렵다. 미러링에 대한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고, '혐오에 혐오로 맞서지 말라'는 비난에 수세에 몰리는 상황은 늦든 빠르든 찾아왔을 것이다.   


이선옥 르포 작가는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글에서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것’을 지양하고 '공론장을 만들자'라고 제창했다(“메갈리안 해고 논란? 이건 여성 혐오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디어오늘,  2016.07.25.). 이건 곧 협상이 가능한 공간을 창출하자는 뜻이다. 협상은 힘이 대등한 사람 사이에 성립한다. 주변부로 밀려나 보이지 않는 자들, 사회에서 몫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대화의 테이블에서 처음부터 배제돼있다. 공론장이 제 기능을 해서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처지라면 처음부터 주변으로 소외되지도 않았을 거다. 사회 중심부에 선 자들이 은폐와 배제가 더 이상 효과가 없다고 깨달을 때, 상대를 다룰 수 있는 선택지가 대화밖에 남지 않았다고 깨달을 때, 서로를 동등한 상대로 인정하는 대화가 시작된다. 노조가 사측과 대화 테이블에 앉기 위해 파업을 선행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ize 위근우 기자의 상대를 “제대로 된 논의의 장으로 끌어 앉히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지랄을 해서라도 깨갱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동의한다(“메갈리안, 분노가 이긴다”, ize, 2015.09.16.).     


메갈리아를 비난하는 여론은 메갈리아에게 반사회적 혐오 성향을 반성하라고 촉구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메갈리아 바깥의 사회에 메갈리아를 배제하라고 명령하는 중이다. 이렇듯 정당한 이유 없이 코너에 몰린 사람들에게 ‘성찰’을 촉구하는 건 윤리적으로 파산한 어법이다.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 퇴장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론은 메갈리아가 이룬 양성평등 성과마저 부인하고, 남녀 대결을 조장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여성차별/여성 혐오라는 젠더 갈등을 사회 갈등의 목록에서 철거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선옥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만들자고 권고한다. 지당해 보이지만 무책임한 말이다. 오직 메갈리아를 축출하기 위한 명분으로 반인권적 행위를 하는 건 사회 사안을 합리적으로 논하기 위한 토대, 공론장의 규칙을 무너트리는 행위다. 이선옥처럼 저런 행태를 관용하는 주장은 공론장의 건설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행태가 부당하다고 중지를 모으는 것이 공론장을 건설하기 위해 지금 해야 하는 일이다. 남성들은 메갈리아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고, 그들을 보고 싶지 않다고, 명분과 체면을 내려놓고 실력행사를 하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그들이 느끼는 초조함이 한계 수위에 도달했다는 정황이다. "한겨레가 이럴 줄 몰랐다" "경향마저 이럴 줄 몰랐다" "정의당 너마저" 같은 반응이 튀어나온 것도 아군이 줄어들고 있다고 느끼는 고립감의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이 전선은 중요하다. 


우리 사회가 미러링 이후의 여성운동을 함께 논의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소리 질러 억압”하는 건 더이상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것이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존중한 채 진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원본이 된 '혐오'는 불문에 부치고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것’만 비판하는 게 아니라, ‘혐오’와 ‘그 혐오에 맞서는 혐오’를 모두 지양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지금은 메갈리아를 비판할 때가 아니라 메갈리아를 향한 비판에 맞서 더 많은 힘을 실어야 할 때다. 앞서 말한 구구한 비평적 시선을 모두 거두고, 나는 메갈리아를 지지한다. 여기엔 어떠한 조건도 유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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