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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Aug 23. 2016

중세를 여는 제물

연예인 여론재판

광장에 또다시 횃불이 타오른다. 도열한 군중은 열기에 들뜬 성난 외침을 뱉는다. 무대 위로 죄인이 오른다. 집행관은 그의 죄목과 형벌을 알린다. 짚더미에 불이 붙고 순식간에 커진 화염이 죄수의 몸을 잡아먹는다. 공개처형. 이 죄인의 이름은 ‘연예인’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반복되는 문화사회적 사건은 무엇일까. 적어도 2010년대 이후라면 이렇게 단정할 수 있다. 연예인 여론재판이다. 과장도 비유도 아니다. 2010년 전후로 일어난 스캔들 목록이다. 박재범 2PM 퇴출, 타블로 학력위조 의혹, 티아라 왕따 사태, 무한도전 슈퍼7 콘서트 파행, 아이유 셀카 유출, 비-김태희 열애설로 촉발되었고 몇 개의 유사한 사건이 벌어진 연예병사 논란, MC몽 컴백 사태, 예원-이태임 욕설 스캔들, 옹달샘 여성혐오 스캔들, 아이유 ‘제제’ 소아성애 논란, 설현 역사관 논란, 박유천 성폭행 피소, 티파니 욱일승천기 논란… 당장 떠오르는 큰 사건만 꼽아 본 게 이렇다. 이 사건들은 사회 각 방면의 쟁점과 결부됐고, 하나같이 당대 여론의 눈과 귀를 독차지한 메가 이슈다. 그 빈도와 강도가 점점 증폭될뿐더러, 더 이상 한낱 ‘연예인 얘기’로 웃어넘길 수 없다. 불과 며칠 전에도 티파니 논란이 터졌고 그녀는 고정 출연 예능프로에서 하차했다.      


저 스캔들 모두를 ‘대중의 광기’와 ‘마녀사냥’으로 규정할 순 없다. 사안의 성격에 따라 마땅히 논란이 될 일도 있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렇다. 어떤 경우에 무엇을 이유로 연예인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가. 이 사회문화적 사건의 연쇄 아래 흐르는 논리가 무엇이고, 지금 이곳에서 연예인은 어떤 존재냐는 거다. 이것은 무겁고 시급한 사회적 주제다.      


연예인은 공인인가      


JYJ 멤버이자 연기자로 활동하는 박유천의 성폭행 피소 사건이 터진 6월, 경찰청장 강신명은 인상적인 담화를 발표했다. “연예인은 공인에 준하는 신분이다. 엄정히 수사해 국민께 알려 드리겠다”. 성폭행 신고가 엄정히 수사할 사건이라는 데 다른 의견이 있을 리 없다. 나는 그가 엄정한 수사의 근거로 거론한 ‘연예인은 준공인’이라는 표현을 지목하는 거다. 이런 표현은 전혀 새롭지 않다. 사실은 ‘준공인’도 한 발짝 물러선 표현이다. ‘연예인은 공인’이라는 인식은 한국 사회에서 스테레오 타입이다.      


연예인이 공인이냐 아니냐는 public official과 public figure의 문제로 귀착된다. 영미권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 public official은 공직자를 일컫고 public figure는 유명인에 가깝다. 공인(公人)의 사전적 정의, 즉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의 정의에 부합하는 건 당연히 public official이다. 연예인은 사적인 일에 종사하는 유명한 사람, public figure다. 이런 분류에 의할 때, 한국 사회가 연예인에게 가하는 비난은 상당 부분 과도하다. 공인이라는 규정은, 그의 모든 행동을 도마 위에 올리고 감시할 당위가 있다는 착시를 빚는다. 공직자는 공동체의 중요한 사무를 관장한다. 그의 도덕성과 사명감이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연예 기획사 연습생이 다이어리에다 조국을 욕했다고 추방한다면 광기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여성 두 명이 함께 일을 하다가 말다툼을 했다고 악플의 먹잇감이 될 명분도 없다.      


사회적 책임이란 꼭 공인이란 신분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유명인은 널리 알려진 만큼 존재감과 발언권, 여론에 대한 일정한 영향력을 지닌다. 연예인이 공적 임무를 맡거나, 공적 활동에 참여하고, 유명세를 걸고 공적 의제에 발언할 때도 있다. 나는 지금 공인이라는 잘못된 규정이 아니라, 연예인의 행동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판단하자고 제안하는 중이다. 그 명확한 기준은 공중 앞에 어떤 언동을 노정했으며, 그래서 어떤 공적 가치를 어겼느냐다. 이 기준은 연예인 스캔들 유형 몇 가지에 즉시 답을 내준다.      


연예인이 노정한 언동이 공적 가치와 연결돼 있다면 토론거리가 된다. 가령 지역차별, 인종차별, 성차별 발언을 공공연히 일삼은 유명인이 있다면 묵과할 수 없다. 옹달샘 사건이 바로 그렇고, 경중에 따라 다르겠지만 범법행위와 사회적 비행을 저지른 유명인도 비슷한 운명이다. 이렇게 이슈가 된 문제에 대한 여론의 반응이 해당 쟁점에 관한 사회적 입장을 느슨하게라도 대표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공중 앞에 드러내지 않은 연예인의 사적 영역은 프라이버시로 선을 그어야 한다. 예원-이태임 사건과 박재범 다이어리 사건, 아이유 셀카 유출, 설현 열애설 같은 무수한 열애설이다. 또한 공중 앞에 노정하더라도 어떤 가치가 결부되지 않은 문제에 열을 올린다면 우습다. 최근 꾸준히 논란이 된 설리의 SNS 게시물이 그렇다. 겉옷 아래 가슴 속옷을 착용하지 않은 사진을 올리는 게 무슨 공익을 좀 먹겠나. 이런 일에 ‘공인’이란 이름을 보자기처럼 덮어 씌우며 펄펄 뛰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눈앞이 아득하다.      


그만큼 한국에서 공인이란 개념은 휘어져 있다. 심지어 내키는 대로 모순된 잣대를 휘두른다. 공인이 병역을 회피했다며 MC몽을 욕하던 애국자들이 정치인을 놔두고 왜 옹달샘을 잡느냐고 사해동포주의자로 변한다. 작년부터 미디어에서 여성혐오 스캔들이 빗발쳤고, 혐오표현을 한 연예인을 비판하는 데 논란도 혼잡하다. 위에서 서술한 기준은 그런 논란을 정리하는 데도 유용할 것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한사코 연예인을 공인이라 호명하려 드는 사회적 저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종종 가혹한 비난과 인격적 침해를 인내하라고 강요하는 명분으로 쓰인다. 말 그대로의 공인이라 해도 공적 책임을 질 뿐이지만, ‘연예인은 공인’이란 수사로 사생활 털이를 정당화하는 촌극이 벌어진다. 이런 오도된 인식을 헤아리려면 한국 사회에서 연예인이 어떤 존재인지 병리적 진단을 가해야 한다.   

   

중세적 공동체의 재현물     


한국사회에서 연예인은 다양한 존재양태를 지닌다. 그들은 상류계층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베버리힐즈의 마네킹이다. 자신이 가진 몸과 재능 하나로 인기를 타고 승천하는 연예인에겐 성공의 상한선이 없다. 사회 트렌드와 여론의 주목, 언론이 가공한 이슈에 의해 자고 나면 인생이 바뀌는 직업은 연예인 외에 없다. 오늘날엔 인터넷과 모바일, 케이블 채널처럼 연예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창문이 늘어났고 연예인을 소비하는 범위도 달라졌다. 춤추고 노래하는 ‘딴따라’를 넘어 연예인은 육아방송과 뷰티 방송, 리얼리티 프로를 누비며 번쩍거리는 삶을 전시하는 셀러브리티로 패치됐다. 비록 그 저변에 숱한 무명 연예인이 생활고와 씨름하더라도 말이다.      


대중에게 연예인은 운이 좋아서, 얼굴 하나 잘나서 벼락부자가 된 자들이다. 대중이 열외 없이 편입되는 학벌 경쟁을 우회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생산 활동’도 없이, 부의 대물림이라는 세습 제도를 건너뛴 채 내가 동경하는 삶을 누린다. 연예인은 자격 없이 막대한 부를 거두는 ‘불로소득자’다. 때문에 과분한 행복에 항상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치르며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대중인 ‘내’가 하사한 인기로 누리는 행복이므로. “팬들의 사랑으로 유명해져 수십억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데 자기 사생활까지 지키겠다는 것은 욕심”이라는 ‘디스패치’의 주장을 보라(“잇따른 연예특종, 탐사보도인가 파파라치인가”, 미디어오늘, 13.01.05). 이 무도한 소리가 바로 대중의 인식을 반영한다. “연예인은 공인이니까 비판을 감수해라”는 논리와 꼭 닮았는데, ‘공인 논리’를 배후에서 추동하는 것이 왜곡된 소비자 논리와 집단적 박탈감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사생활 침해와 여론 재판은 그렇게 정당화된다.      


중세 유럽에서 자행된 공개처형은 희생제의인 동시에 열광에 찬 축제였다. 교수대 위에 선 죄인의 뼈를 부러트리고 살을 불태우는 처벌은 공동체의 구원과 보속이라는 율법에 복무했다. 죄인은 공동체의 일체감과 국가 질서를 수복하기 위한 제물이었다. 군중은 삼엄하게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법과 국가, 신이란 대타자의 전능함에 전율했다. 질서와 공동체의 회복을 축하하기 위해 처형장에는 수천 명의 사람이 모였다. 군중은 고통받는 죄인을 가리키며 왁자지껄 웃고 환호성을 지르고 난동을 부렸다. 죄인의 비참한 모습을 동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눈 뭉치를 던지며 조리돌림 했다. 교수대의 스펙터클은 개인의 고통을 주물러 환락을 빚어냈다.      


한국 사회에서 대중에게 이 엑스타시를 투여하는 건 연예인 심판이다. 공동체의 도덕관념을 거스르는 연예인이 포착되면 모욕을 퍼붓고 추방명령을 내린다. 이른바 정의의 퇴출. 그곳에 죄형법정주의와 형벌 비례의 원칙 같은 건 없다. 연예인의 뒤를 캐는 황색 언론과 네티즌 수사대가 비행을 적발해 공표한다. 대중은 그를 심문하고 판결하고 처형까지 집행한다. 공동체에 정의가 사라진 죗값을 그에게 묻고, 하나씩 차돌을 쥐고 댓글 창에 투척하며 내 손으로 정의를 일으켜 세우는 열락에 젖는다. 연예인 여론 재판이 종종 국가주의, 민족주의와 결부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국가라는 거인, 민족이란 상상적 공동체가 현현하고 구성원들의 소속감을 고양하는 데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고작해야 역사 상식이 없다는 이유로 걸그룹 멤버를 난자하며 민족의 열사를 강림시킨 사태를 달리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말했듯이 나는 연예인의 공적 행동을 비판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가령 이번 티파니 사태는 비판받을 만하다. 침략전쟁의 상징을 공공연히 전시하는 건 윤리적이지 않다. 따라서 본인이 잘못을 시인하면 그것을 접수하고 차후를 위한 전례로 남기면 된다. 여기엔 어떠한 고의성도 없었다. 하지만 여론은 티파니를 민족의 배신자, 머리 빈 탕녀로 몰아가기 여념 없었고, ‘쪽파니’ 같은 원색적 욕설이 환호를 얻었다. 작금의 행태엔 비판의 기준점도 처벌의 합리성도 희미하다. 공론에 의거한 비판을 넘어 종교적 수준의 심판이 횡행하곤 한다. 대중은 마녀의 이마에 인두를 지지고, 젊은 영웅이 추락하는 장관을 지켜보며 몰락의 서사를 즐긴다. 그 배후에선 일상에서 해소할 길 없는 어두운 정념이 대의명분을 입고 흩날린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연예인은 현대 한국에 중세적 세계관을 여는 공물이다. “범죄자에게 인권은 없다”는 인권에 대한 냉소, 교화가 아닌 박멸을 원하는 엄벌주의에 대한 매혹. 이런 한국인의 전근대적 의식이 시민권을 얻어 정기적으로 구현되는 해방구가 연예인 공개처형장이다.   

   

연예인 문제의 보편성 


인권이란 개념의 생명은 보편성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다. 이 보편성으로 인간의 권리는 사회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보편자에서 소수자에게로 분배될 수 있었다. 인권의 역사는 계급과 종교, 인종과 성차의 벽을 부수고 보편성을 관철해온 역사다. 북미의 사학자 린 헌트는 『인권의 발명』에서 설명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권리의 평등이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일단 개신교도의 종교적·정치적 권리를 허락하는 것이 논점이 되자, 종교적 소수자란 의제가 떠올랐으며 유대인의 지위도 연동되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를 따라 자유시민 흑인과 흑인 노예, 여성의 문제도 공론화됐다. 평등의 확산을 두려워한 존 애덤스란 인물은 1776년에 쓴 편지에서 들불처럼 번지는 보편성의 위력을 정확히 시인했다. “…그처럼 풍요로운 논의와 언쟁의 원천을 열어놓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요구들이 등장할 겁니다.”      


반대로 논리를 펼쳐보자. 인권을 누릴 ‘자격’에 한 번 예외를 만들면 그 보편성이 기각되고 예외지대가 점점 커질 수 있다. “범죄자에게 인권은 없다”, “공인은 사생활이 없다”라고 인권의 열외자를 상정하는 건 그래서 위험하다. 감이 잘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 연예인은 너무나 특수한 직종이고, 대중의 삶과 동떨어진 인물이니까. 생각해보자. 공적 명분을 이유로 집단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버릇이 어떤 잘못을 빌미로 이름 없는 사인마저 신상을 터는 문화와 무관할까. 무엇을 수단으로 돈을 번다는 사실에 인격적 침해를 덧붙여 정당화하는 논리는 감정 노동자 학대와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그들도 사람들에게 웃음을 팔며 돈을 버는데 아무리 불쾌해도 참고 웃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난 7월에 있었던 게임회사 넥슨의 김자연 성우 교체 사건도 그렇다. 메갈리아 티셔츠를 산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그녀가 ‘프로’이기 때문에 문제라며 몰아가는 여론이 있었다. 이것은 ‘공인’이란 말의 자리에 그저 ‘프로’를 대입한 것이다. 합법적으로 인권을 약탈하는 논리는 이렇게 변주되고 퍼져 나갔다. 내가 연예인의 인권을 말하는 까닭은 나와 동 떨어진 대상을 향한 막연한 정의감이 아니다. 내 삶과 연결돼있고 내 삶을 아우르는 인권의 보편성이 귀중하기 때문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고도로 발달하고 미디어가 곧 일상이 된 시대다. 연예인, 유명인의 실존에도 많은 논점이 달려 있다. 우선 공인이란 개념에 대한 이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에 대한 합의가 있다. 파파라치 산업은 세계적으로 성행하지만 그것에 ‘탐사보도’라고 공익을 데코레이션 하는 나라는 한국 말고 없을 것 같다. 연예인의 직업과 사생활에 경계를 긋지 않는다면, 여배우의 스캔들이 노출돼서 연기 생활도 끝장나는 악순환을 끊을 수 없다. 연예인이 ‘불로소득자’로 취급받는 현실 또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생산 가치를 폄하하는 사회적 고질병을 드러낸다. 연예인 심판은 거대한 소비자 논리의 작동이기도 한데,  한국사회가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론이 뒤틀려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이런 문제들과 진지하게 대면하기 위해선 먼저 지금 이곳에서 연예가 스캔들이 갖게 된 사회적 성격을 직시해야 한다. 말했듯이 이건 한낱 ‘연예인 얘기’가 아니다. 이 글이 앞으로의 논의가 진전하는 데 중요한 참조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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