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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Sep 08. 2016

이념의 의식화의 빈자리

시사인 욱일승천기 사태

메갈리아 사태와 그로부터 촉발된 시사인 사태는 혐오, 표현의 자유 같은 보편적 가치를 당파성에 따라 멋대로 전유하고, 숙의를 통해 풀 문제를 모욕죄 소송, 불매운동 같은 실력 행사로 굴복시키려 하는 등 공론장의 규칙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것이 야권-남초 커뮤니티 여론과 놀라울 정도로 말이 통하지 않는 배경이다. 여성 혐오, 혐오 표현 같은 보편적 의제에 대한 논쟁이 범 진보진영 내 당파 싸움으로 전치되었다는 사실도 해결의 실마리를 엉망진창 헝클어트린다. 이는 소통 부재, 갈등 심화 같은 표면적 파열을 넘어 훨씬 근본적인 토대의 붕괴를 암시한다.


시사인 사태는 현 시점에 일어난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축적된 폐단이 비화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가령 소수자 혐오 성향,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 같은 반동적 기질이 있는 야권 시민은 결코 적지 않다. 이것이 권위주의 정권과의 성전과 그들에 대한 타자화를 통해 봉합되며 야권=진보란 지위를 상상적으로 획득해온 것이다. 현재 정세는 박해천 교수가 지적한 바 있는, ‘민주화라는 대의가 더 이상 묶지 못하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분출’과 상통한다. 범야권에 내재한 상이한 갈등축과 이념 성향을 정권 교체란 지상과제로 통합하여 동원하는 과정에서 시민으로서의 의식화, 진보적 가치의 내면화가 방기된 과거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번 사태의 전조는 간헐적으로 울려 퍼졌다. 가령 노무현이 죽고 난 후, 한겨레는 "놈현 관장사"라는 표제의 기사를 냈다가 친노 명망가 및 독자들의 절독 운동에 사과문을 썼다. 이명박 집권 이후 진보 언론의 대주주로 등극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우리편 언론'을 다루는 방식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전사다. 그 후로도 친노파 독자는, 특히 안철수에 대한 논조에 따라 진보 언론을 정론지로 승인하거나 매수된 찌라시로 폄하하는 오락가락으로 길들이려 했다. 그리고 마침내 당파적 입장을 불문하고 '남성 독자'란 이름 아래 단합하여 진보 언론 전반을 향해 지분을 주장하고 시위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권교체, 진보진영이란 단일한 호명이 억압해 온 가치들이 파열음을 낸 전사도 많다. 2012년 나꼼수 비키니 사태가 정확히 그랬고, 이자스민으로 표상되는 다문화 정책에 대한 ‘진보 진영’의 입장이 종종 논란이 됐다. 그 과정에서 일부 야권 정치인과 언론에게 비난이 쏠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진보 진영’은 갑론을박으로 분분했지만, 다원적 가치의 성찰과 공존에 다다르지 못했다. 한국에선 너무 많은 이슈가 돌발하며 연쇄됐고, 정권교체라는 촉박한 프로젝트 앞에서 토론의 시간은 부족했다. 갈등은 증발되거나 미봉된 채 불문에 부쳐졌다. 그리고 곪아서 문드러진 고름으로 터져 나왔다.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건, 지금껏 야권의 조직화를 이루던 방식이 그 내부 차원으로 이행하여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영 밖의 절대악을 상정하여 전선을 긋는 것으로 집단의 구심력을 얻고 스스로의 순결함과 정당성을 취득하는 논리 말이다. 새누리와 일베, 보수언론으로 구성된 친일독재 카르텔에서, 진보정당과 메갈리아, 진보언론으로 규정된 페미나치 카르텔로 ‘절대악’이 바뀌었을 따름이다. 현재 야권-남초 커뮤니티는 새누리당을 대하던 태도로 정의당 및 노동당을 대하고, 조중동을 욕하던 논리로 시사인을 욕하고, 일베에 붙이던 ‘반사회적 혐오 사이트’라는 낙인을 메갈리아에 붙이고 있다. 이렇듯 ‘세력의 조직화’로 ‘이념의 의식화’를 대체하던 야권의 관성이 시사인 사태를 부른 이데올로기적 요인이다.


나는 이 점에서 진보언론이 외압의 피해자, 페미니즘의 수호자로 결백을 과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야권의 조직화 관성에 토대를 제공해온 두터운 축이 진보언론이기 때문이다. 가령 오마이뉴스는 집권세력을 친일독재 잔당으로 치환하며 민족주의 정념에 편승하는 손쉬운 기사를 앞장서서 찍어냈다. 현재 시사인 사태를 일으킨 ‘버튼’이 욱일승천기라는 사실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더 이상 논증이 필요 없이 자명하게 합의된 악의 표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비난의 내적 정당성이 구축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발짝만 물러서 바라봐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비판이 그 내부에선 의심을 일으키지 못한다. 작금의 사태를 풀기 위해선 진보 언론이 피해자의 자리를 벗어나 주체의 위치에서 책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시사인 고재열 기자는 “갈 사람들이 갔으니 눈치 볼 필요가 없어졌다. 그들은 카드를 너무 일찍 꺼냈다”라고 홀가분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동안 시사인이 적극적으로 의지한 후원자가 야권-남초 여론의 자폐적 정의감을 부추겨 온 나꼼수-주진우의 팬덤이란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지금껏 남초 커뮤니티를 넘어 야권 블록을 이루는 주체들에게 책임감을 요구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새누리 집권 8년 동안 사회적 퇴행이 어마어마했고 정권 교체는 실제로 시급하고 중대한 요구였다. 야권 내에서 각종 소수자 의제가 배격되어 온 이유도 52:48의 숫자를 넘어, 여권과 야권 유권자를 가리지 않고 한국 사회 근간에 보수 이데올로기가 압도적이라는 구조적 요인이다. 이렇게 중첩된 현실의 장벽을 인지한 후, 사회 주체들이 문제에 대한 마다의 지분을 짊어지고 좁은 길을 돌파해낼 때 메갈리아 사태, 시사인 사태는 미봉이 아니라 해결에 이를 수 있다. 그럴 때 이 상황을 당파적 연합의 큰 울타리를 뚫고 가치와 이해관계가 분화되는 과도기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대선은 1년 앞으로 다가왔다. 정권교체의 압력은 다시금 사회의 갈등축을 양분하려 할 것이다. 정말 쉽지 않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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