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흔적도 없이(2025.10.20.)
육지에서 들리는 소식과 다르게
제주는 며칠 전만 해도 에어컨 없이 지낼 수 없었다.
덥거나 습하거나.
그런데 하루아침에 겨울이 온 듯
바람이 차다.
내가 사랑하는 가을은
어디로 가 버렸나.
머무는 시간이 해가 갈수록 짧아지는 것 같다.
10월만이라도
가을바람 솔솔이길.
11월까지면 더 좋고.
해가 짧아지고 어둠의 시간이 길어지는 게
나는 싫다.
지난 화요일, 서월 월드컵 경기장에 다녀왔다.
통신사 이벤트로 축구 경기 관람권 응모했는데,
덜컥 당첨이 됐다.
3등석이라 비행깃값이 더 비쌀 터였다.
로또 운이 여기로 다 갔나 웃으며 딸에게 말했는데,
가고 싶다는 게 아닌가.
뱅기 값이 더 비쌀걸, 했더니
그래도 잠깐이라도 꿈꾸게 해줘서 고맙단다.
평소에도 뭐를 요구하는 딸이 아니기에
그 말이 마음에 쓰였다.
진짜 가고 싶냐 물었더니
손흥민 선수 경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겠냐 하면서도
안 가는 게 맞다고 괜찮다고 하는 게 아닌가.
아이는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고 나는 연가를 내서
부푼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추석을 보내고 바로 전날 서울로 간 큰 딸을
공항에서 만났다.
축구도 치킨도 관심 없는 녀석이지만
가족여행이라는 내 말에 동참하기로 했다.
친구가 미리 주문한 치킨을 찾고 경기장을 찾았다.
20분 정도 걸으며 하나 두 개 꺼내 먹은 새우튀김이 잊히지 않는다.
와. 경기장 밖은 큰 축제가 벌어졌다.
기업 홍보에 맞춘 부스 운영에다
붉은 악마 응원 액세서리를 파는 분,
'나, 축구 응원하러 왔소.' 대놓고 응원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넓은 공간이 꽉 찼다.
카스 부스에서 생맥 한 컵을 사서 마시며 기다리는 사이
동탄에 사는 친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 녀석도 큰 애처럼 축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랜만에 보게 된 친구 때문에 한달음에 차를 끌고
경기장으로 온 것이다.
티켓에 적힌 자리를 찾는데,
이러다 발을 헛디디면 뒤로 굴러떨어지진 않을까
걱정이 일 정도로 경사가 있었다.
겨우 찾은 자리 주변은 텅 비어 있었고,
그래서 더 좋았다.
선수들 신발과 등번호 정도만 보이는 곳이었지만
탁 트인 경기장 안으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너무 좋아
친구는 소리를 질렀다.
너무 좋다고, 나와 함께 이렇게 뻥 뚫린 공간에
함께 있어서 가슴 속이 아주 시원하다고.
첫 골을 넣었을 때, 둘째와 나는 부둥켜안고 소리 질렀다.
저 멀리 붉은 악마의 응원과 함께 둘째는 목청껏
대한민국을 외쳤고, 나도 함께 그랬다.
행복이 찾아야 하는 일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왕복 비행기표 2장과 치킨값만 들고
충분히 아니 과하게 행복을 만끽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