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곽지 바다

여름은 흔적도 없이(2025.10.20.)

by 소예

육지에서 들리는 소식과 다르게

제주는 며칠 전만 해도 에어컨 없이 지낼 수 없었다.

덥거나 습하거나.

그런데 하루아침에 겨울이 온 듯

바람이 차다.


내가 사랑하는 가을은

어디로 가 버렸나.

머무는 시간이 해가 갈수록 짧아지는 것 같다.


10월만이라도

가을바람 솔솔이길.

11월까지면 더 좋고.


해가 짧아지고 어둠의 시간이 길어지는 게

나는 싫다.


1760435937367.jpg 한국 vs 파라과이(10.14.)


지난 화요일, 서월 월드컵 경기장에 다녀왔다.

통신사 이벤트로 축구 경기 관람권 응모했는데,

덜컥 당첨이 됐다.


3등석이라 비행깃값이 더 비쌀 터였다.

로또 운이 여기로 다 갔나 웃으며 딸에게 말했는데,

가고 싶다는 게 아닌가.


뱅기 값이 더 비쌀걸, 했더니

그래도 잠깐이라도 꿈꾸게 해줘서 고맙단다.

평소에도 뭐를 요구하는 딸이 아니기에

그 말이 마음에 쓰였다.


진짜 가고 싶냐 물었더니

손흥민 선수 경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겠냐 하면서도

안 가는 게 맞다고 괜찮다고 하는 게 아닌가.


아이는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고 나는 연가를 내서

부푼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추석을 보내고 바로 전날 서울로 간 큰 딸을

공항에서 만났다.

축구도 치킨도 관심 없는 녀석이지만

가족여행이라는 내 말에 동참하기로 했다.


친구가 미리 주문한 치킨을 찾고 경기장을 찾았다.

20분 정도 걸으며 하나 두 개 꺼내 먹은 새우튀김이 잊히지 않는다.

와. 경기장 밖은 큰 축제가 벌어졌다.

기업 홍보에 맞춘 부스 운영에다

붉은 악마 응원 액세서리를 파는 분,

'나, 축구 응원하러 왔소.' 대놓고 응원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넓은 공간이 꽉 찼다.


카스 부스에서 생맥 한 컵을 사서 마시며 기다리는 사이

동탄에 사는 친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 녀석도 큰 애처럼 축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랜만에 보게 된 친구 때문에 한달음에 차를 끌고

경기장으로 온 것이다.


티켓에 적힌 자리를 찾는데,

이러다 발을 헛디디면 뒤로 굴러떨어지진 않을까

걱정이 일 정도로 경사가 있었다.

겨우 찾은 자리 주변은 텅 비어 있었고,

그래서 더 좋았다.


선수들 신발과 등번호 정도만 보이는 곳이었지만

탁 트인 경기장 안으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너무 좋아

친구는 소리를 질렀다.

너무 좋다고, 나와 함께 이렇게 뻥 뚫린 공간에

함께 있어서 가슴 속이 아주 시원하다고.


첫 골을 넣었을 때, 둘째와 나는 부둥켜안고 소리 질렀다.

저 멀리 붉은 악마의 응원과 함께 둘째는 목청껏

대한민국을 외쳤고, 나도 함께 그랬다.


행복이 찾아야 하는 일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왕복 비행기표 2장과 치킨값만 들고

충분히 아니 과하게 행복을 만끽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