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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아나 Jan 22. 2022

당근에 판 티파니 반지

백수(자칭 프리랜서)가 된 지  6개월 차, 예금통장에 3만 원이 남은 것을 확인한 아침이었다. 어쩜 숨만 쉬는 값이 이렇게나 나가는지, 비싼 한숨을 쉬며 얼마 안 되는 주식계좌의 주식 반을 정리했다. 손해만 안 났을 뿐, 예금과 무슨 차이가 있나 싶은 정도의 수익으로 정리하며 이 얼마 안 되는 예수금조차 이틀 뒤에 들어온다는 사실에 아찔해졌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이 사라진 백수(또는 프리랜서)의 기본 삶의 자세는 앞으로 어떤 일이 내 인생에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기본 가정을 깔고 사는 것이다. 이 '앞으로 생길 어떤 일'을 상상하는 기본 사고 회로가 부정으로 가있으면 지속해 나가기가 힘들다.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언제 좋은 일이 생길지 몰라!'라는 긍정 회로에 의식적으로 페달을 돌려야 이 삶의 방식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이러한 긍정적 마음가짐으로 '오늘은 전에 일했던 프로젝트 정산금이 들어오겠지!' 하는 긍정 회로에 억지로 에너지를 들이붓는 와중에 당근 마켓 어플에서 알람이 왔다.

 

 '티파니 반지 아직 구매 가능한가요?'


한국에 돌아와 한 달 정도 부모님 집에 머물다가 다시 이사를 나오고 나서, 부모님 집에서 쓰던 화장대를 가지고 가기 위해 화장대 안의 잡동사니들을 정리하던 와중이었다. 6년 전 헤어진 남자 친구가 선물해줬던 티파니 반지가 잔뜩 산화된 상태로 발견됐다. '나한테 이런 물건이 있었지..!' 하는 잊고 있던 반지의 존재 자체를 확인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찰나, '오! 이거 당근에 팔면 당분간 용돈 되겠는데?' 하는 생각이 바로 떠올랐다. 반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은 세척액에 담가 세척을 하고 말리면서, 선물 받을 때도 검색해보지 않았던 반지의 백화점 판매가를 검색했다. '오 생각보다 큰 용돈이 되겠는데?' 흡족해하며, 다음 수순으로 반지의 당근 마켓 시세를 검색하다가 판매글에 반지 사이즈를 써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몸의 말단이 짧은 편이라 반지만 끼면 손가락이 더 짧뚱해 보여서 반지를 잘 끼지 않는데, 그래서 내 열 손가락 어느 것의 사이즈도 알지 못했다. 도구 없이 반지 사이즈 재는 법을 검색해서 종이를 말아 손가락 둘레를 쟀다. 이제 판매용 사진을 찍겠다며 반지를 민트색 케이스 위에 올리고 요리조리 각도를 살려 사진을 찍는데, 반지의 흠집 사이에 산화된 자국 때문에 도저히 깔끔해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결국 사진 찍기 전 반지를 들고 매장에 가서 세척까지 받아왔다. 그런 장장 이틀간의 노력 끝에 예쁘게 사진을 찍어 당근 마켓에 올려놨지만, 며칠간 연락이 없어서 살짝 아쉬워하던 와중에 긍정 회로의 응답처럼 당근 마켓 알림이 온 것이다.


'네 그럼요! 직거래 가능합니다!'


반가운 마음에 느낌표까지 찍어가며 답장을 보내고 이런저런 주문에 답장을 하고 직거래 약속을 잡았다. 바로 다음 날 오전 휴가를 내고 우리 집 지하주차장까지 달려온 그녀는 앞머리에 롤을 달고 어그부츠를 신고 신나는 표정으로 하얀 경차에서 내렸다. 반지가 잘 맞는 것을 확인하고 계좌번호에 입금을 하면서 그녀는 '이 디자인 계속 찾고 있었어요. 요즘엔 단종돼서 잘 안 나오더라고요. 당근에서 보고 너무 반가워서 설렜던 거 있죠!!' 하며 흔쾌히 끝까지 아무 네고없이 쿨거래를 완료했다.


사실  반지를 받았을  마음은 좋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애매한 감정이었다.  오래 만난 후에 선물 받은 반지였는데, 속으론 은근 커플링을 하고 싶었는데 패션 반지를 받아서 마음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었다. 그래도 너무 좋아했던 사람이  선물이었고,  디자인도 마음에 들어서 헤어지기 전까지  몸의  부분인  정말 열심히도 끼고 다녔었더랬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헤어진  수개월을  머릿속 가득히 자리하고 있던 사람과의 추억을 화장대 정리 전까지 존재 자체도 잊고 있었던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리고 반지와  몸같이 지냈던 세월이 사용감이라는 이름을 얻고, 6  감가상각으로 전락해버렸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씁쓸했던 것은   년간의 사랑과 집착과 미련의 전리품이 누군가에게 설렘과 기쁨이 되어  손에서 떠나가는 장면이었다. 가장 사랑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과  이후의 세월에 쌓인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손바닥 뒤집  정체성이  바뀌어 버린 이상한 기분이었다.  년이 지나도록 붙잡고 있던 끈이  끊어지는 기분. 드디어  관계의 미련에서 해방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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