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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아나 Feb 03. 2022

가부장이 지난 자리

제사 없는 설 명절을 보내며

2022년 설 연휴를 방금 빠져나온 지금, 나에겐 매우 새로운 명절을 경험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새로운 명절 이야기를 하려면 나의 뿌리부터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나의 아빠는 종갓집의 장남의 장남의 장남의 장남이다. 물론 그 위엔 더 많은 장남 할아버지들이 있겠지만, 내가 아는 선에선 그렇다. 딸 둘을 낳은 후 아들을 더 낳으라고 권유하는 나의 할아버지에게 젊은 시절의 아빠는 딸 둘로도 충분하다며 강하게 반항하여 나는 여동생 하나만 가지게 되었다. 엄마는 할아버지에 대한 아빠의 이 반항을 아빠에게 유일하게 고마운 것이라 시니컬하게 얘기하곤 한다. 유일하게 고마운 점이라는 게 마냥 과장만은 아닌 것이 엄마는 아들을 낳아야 하는 압박에서는 해방되었지만, 종갓집 장남과 결혼한 근본적인 이유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굴레와 같이 매년 일곱 번의 제사 음식을 책임져야 했다. 나의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의 기일, 돌아가시기 전까지 집안 제사를 맡으셨던 할아버지의 기일 그리고 민족 대 명절이라고 읽지만 누군가에게는 업무 외 추가 근무일인 설과 추석, 모두 다 합해 매년 일곱 번이었다.


기존 체제를 전복시킨 프랑스 대혁명으로 박사논문을 썼고, 여성학을 가르쳤던 엄마였지만 머리가 굵은들 튼튼하고 견고한 한국의 가부장제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약간의 결벽증, 완벽주의와 함께 모범생의 길을 살아온 엄마는 제사를 일종의 훌륭히 치러내야 하는 태스크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엄마의 태스크 완수에 투입되었던 건 엄마가 가르친 그대로 일 할 수 있는 큰 딸, 바로 나였다. 평생 제사 준비에서 지방을 쓰는 것과 밤 치는 것 밖에 하지 못하는 아빠와 작은 아빠, 엄마와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작은 엄마나 사촌언니들, 본인 집안의 제사에는 본인들 아버지 제사 밖에 상관하지 않는 고모들은 그 누구도 엄마의 성에 차지 않았고, 엄마는 당연히 가장 만만하고 편한 나를 선택했다. 엄마의 방식을 도제식으로 전수받은 나는 엄마에겐 최고의 조수였다. 중학생 때부터 조상님들의 제사 당일과 명절 전날의 전 부치기는 항상 내 담당이었다. 전 부치기에 대한 기본 가이드라인은 최대한 밀가루층을 얇게 하여 최대한 얇게 전을 부치는 것이었고, 배추전, 부추전, 동태전, 버섯전, 연근전, 고구마전, 동그랑땡 등 각각 나름의 엄마의 가이드라인이 있었다. 일 년에 일곱 번 이상을 명절 특선영화 두 세편의 시간 동안 전을 부쳐내니 나의 전 부치기 실력은 매년 일취월장했으나, 해가 거듭될수록 전을 부치고 난 저녁이면 기름을 몸에 한 바가지 끼얹은 기분으로 녹초가 되어 입맛이 똑 떨어지곤 했다. 남들은 명절 때마다 잔뜩 먹고 살이 쪄서 돌아온다는데 나는 제사상에 올린 나물과 고추장을 넣을 수 없어 간장으로 간을 한 비빔밥, 제사 중에 다 식어버린 차디찬 조기와 전, 여러 번 끓여 뭉그러진 갈비찜까지 그 어떤 것도 먹고 싶지가 않았다. 특히 전은 평소에도 꼴 도보기 싫었는데, 대학생 때는 무한도전 때문에 유명해졌던 공덕동 전 골목 때문에 더욱 곤란했다. 결국 친구들이 아무리 가보자고 졸라도 나의 전 부치기 역사에 대해 일장연설을 해가며 친구들만 보내곤 했다.


게다가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나아 잘 기르자를 실천하며 할아버지의 아들 타령에 반항했던 아빠는 역시 남녀 차별을 해선 안된다는 일관된 기조로 장녀인 나를 제사 진행 보조로 활용했다. 아빠 옆에 서서 조상님께 올리는 제기에 백화수복을 따르고, 조상님이 드실 음식에 수저와 젓가락을 얹고, 다 드신 후엔 국을 따라내고 국그릇에 숭늉을 만들었다. 남녀차별 없는 제사는 장녀에게 음식 준비부터 진행까지 멀티플레이를 요구했다.


전 부치기와 제사의 메인 스테이지에서의 보조역할이 지긋지긋해서 제사 준비를 펑크내고 친구들과 나가 놀다가 밤늦게 돌아온 대학 시절의 어느 추석 전날, 성에 안 차는 동생을 데리고 힘겹게 제사음식 준비를 마친 채 나를 현관문에서 무섭게 노려보던 엄마의 눈빛은 아직도 내 마음에 박혀있다. 가부장의 무게를 나눠들지 않은 값은 어이없게도 아빠가 아닌 엄마의 분노가 되어 내 마음에 깊게 새겨졌다. 이후로 나는 차마 제사 준비를 펑크 내지는 못했고, 엄마로 부터 받은 분노의 화살을 아빠에게로 돌렸다. 제삿날과 명절마다 아빠는 나와 엄마와 동생의 잔소리를 받아내야 했다. 나는 마루 가득 신문지를 펴고 전을 부치면서 왜 종갓집 딸로 태어나서 명절마다 좋아하지도 않는 전을 부치며 허리가 아파야 하는지, 남들 해외여행 갈 때 나는 왜 마룻바닥에 끓어 앉혀져야 하는지, 친척들은 아무도 오지 않는데 누구 눈치를 보는 것인지, 행동하지 못하는 아빠를 향해 가시 돋친 말을 해댔고, 아빠는 삼중으로 날아오는 화살들을 농담으로, 헛웃음으로 피해대느라 바빴다.


그렇게 또 십여 년이 지났고 몇 년 전 가부장의 희생자 중 한 명이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늘 자신이 죽은 후엔 제사 대신 연미사를 지내라고 하셨다. 그렇게 할머니는 돌아가시면서 감사하게도 우리 집 여자들에게 제사를 여덟 번이 아닌 일곱 번으로 유지시켜주었다. 아빠가 눈치를 보던 윗세대 친척들이 차례차례 돌아가시자 아빠는 그제야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서서히 고조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제사를 합쳤고,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의 제사를 합쳐나갔다. 그러던 와중 사촌언니가 결혼을 하면서 작은 아빠가 명절에 오시지 않기 시작했고, 동생도 아기를 낳아 엄마는 다시 한번 손주 육아의 세계로 끌려들어 갔다. 눈치보기의 세월이 끝났기 때문일까, 엄마의 육아로 인한 고생이 이유였을까. 아빠는 올해 설 처음으로 명절 제사를 위령미사로 대체했다. 엄마는 1년여간의 손주 육아로 심신이 지쳐있었고, 작은 딸이 시댁에 간 기간을 본인의 휴가로 받아들였다. 큰 딸에게도 본인이 너무 피곤해서 쉬어야 하니 긴 연휴 내내 와있지 말고, 설 전날 저녁에 오라고 부탁했다. K 종갓집 장녀 역시 일생 첫 명절 전 날 휴가를 받은 것이다. 명절 전 날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요가를 하고, 글을 쓰고, 여유롭고 평화로운 반나절을 보낸 후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제사에 올린 후 먹는 갈비찜이 아닌, 갓 조리한 갈비찜을 나눠 먹었다. 부모님 집의 내 방에 누워 자려는데, 문득 내 방 옆 베란다에서 식은 전 냄새를 맡으며 자지 않아도 되는 것에 새삼스레 행복했다. 조절되지 않는 보일러 탓에 겨울에 덥고 건조한 부모님 집의 내 방은, 겨울에 베란다로 통하는 창문을 열어놓고 자야 온도와 습도가 맞춰지곤 하는데, 설 전날엔 베란다에 전과 온갖 제사 음식이 놓여 있어서 창문을 열면 식은 전 냄새 때문에, 창문을 닫으면 덥고 건조한 공기 때문에 늘 선잠을 자곤 했었다.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창문을 열고 쾌적하게 자면서 한 가족의 가부장의 한 챕터가 이렇게 넘어가는구나 생각했다.


아빠는 미리 아빠의 조상님과 엄마의 조상님께 위령미사 예물을 바쳤고, 엄마의 조상님들은 처음으로 자손들의 챙김을 받았다.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엄마의 조상님들의 어리둥절한 기분을 상상해보며, 가족 단체 카톡방에 위령미사 예물에 '미카엘라의 조상님'이 포함된 사진을 자랑스레 보낸 아빠에게 열몇 개의 박수 이모지를 보내며 위령미사에 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나는, 막상 설 당일 아침이 되자 눈이 왔다는 핑계를 대고 실컷 늦잠을 잤다. 엄마와 아빠, 새벽부터 일어나 답답해하는 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가야 했던 동생과 제부는 성당으로 향했고, 나는 그들이 미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자다가 돌아온 그들을 위해 점심을 준비해 함께 먹었고, 설거지는 아빠가 했다. 조카는 태어나 처음으로 어설픈 세배를 했고 모두 기뻐하며 세뱃돈을 선사했고, 세뱃돈은 기쁜 마음으로 동생이 챙겨갔다. 아무런 갈등도 없었고 모두가 가사노동을 나눠서 한 평화로운 설날이었다. 생애 처음, 모두가 행복했던 진정한 민족 대 명절이었다.


최대한 보지 말자, 제삿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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