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내 감정 이야기해 보기
나의 우울증의 병세에도 기승전결이 있었다고 보았을 때, 그 병세와 부모님과의 갈등이 절정인 '전(轉)'에 해당하는 시기에 대한 이야기다.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툭 터져 나올 시기였는데, 눈물로도 해결되지 않는 화는 엄마, 아빠와는 전쟁(戰爭)을 벌이면서 해소되기 시작했고, 인구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일으키는 전쟁처럼 쌓인 분노를 녹여내기 위해 전쟁은 시작되었다.
시작은 엄마와 아빠가 나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점에 대한 인지에서부터였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부터 어떤 감정도 부모님과 나누지 못했다. 엄마에겐 나와 내 동생, 두 자매는 본인 성취의 한 부분이었다. 엄마는 결혼 전후 모두 원하는 만큼의 경제적인 여유를 갖지 못했고, 대신에 애매한 만큼의 커리어적 자유를 얻어 육아와 함께 박사학위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커리어와 육아,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요즘 세대에도 많은 경우에서 실패하는 것과 같이 두 자매의 교육을 위해 엄마의 커리어는 희생되었다. 육아라는 큰 장벽이 없었다면 엄마의 명석함과 성실함으로 어느 대학 정교수자리 하나는 꿰찼을 것이라는 것이 아빠와 나, 내 동생의 중론 이지마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집안의 경제력, 인문학의 위축 등 여러 요소를 감당하기에 엄마는 너무나도 역부족이었을 것이고, 엄마는 늘 연구교수(=시간강사) 직함에 만족해야 했다.
엄마는 본인의 커리어에 대한 불만족을 동생과 나의 학업적 성공을 통해 채웠다. 전교 등수나 상장을 통해 쉽고 명확하게 드러나는 학업적 성취는 남의 눈에 드러나게 똑똑해야 함과 동시에 과시하면 안 되는 엄마의 가치를 충족시키기에 쉬운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저 매 시험 결과 이후(주로 내 동생) 부러워하는 주변 어머니들 사이에 겸손한 태도로 '운이 좋았어요'라고 미소 지으면 되었을 것이다. 학창 시절 나는 공부 잘하는 학생(모범적이진 않았던 듯하다)의 타이틀을 유지하는 것이 엄마와의 관계를 잘 맺는 방법이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사춘기가 시작되고 친구들과의 관계가 쌓이면서 엄마보다는 친구들과 나의 생각과 상황에 대해 더 많이 나누기 시작했다. 부모님과의 대화가 아주 적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엄마의 경우 말이 많은 편이고, 아빠의 경우도 반주 한 잔 들어가기 시작하면 말이 많아지는 편이었다. 저녁때마다 와인 한 잔 하면 수다의 꽃이 피곤했지만, 주로 남의 신변잡기나 인문학적 소양이 높은 아빠와 역사를 전공한 엄마의 지식과 생각 교환이 주였고, 나와 내 동생의 이야기로는 성적과 시험, 취업 이후에는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 정도가 다였다. 엄마 아빠는 두 자식들에 대해서 각각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분야에서 한몫하고 있는 것 이면에 무엇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우리는 말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 가를 너무나도 중요시했던 교육 탓이었을 것이다.
또한 연애의 희로애락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나누지 못했다. 오래 만난 애인들에 대해 언뜻 이야기를 하면, 엄마는 그들의 직업과 심지어 고향 때문에도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연애를 할 때마다 엄마를 속이는 맘 졸이는 연애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밤늦게 전화 통화를 할 때도 목소리를 죽여가며 얘기했고, 남자 친구에게서 꽃다발이라도 받은 날엔 기쁨과 함께 이걸 어떻게 집에 들고 들어간 담 하는 걱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홍콩의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 잠깐 들어와 대면 상담을 다시 받으면서, 상담 선생님이 엄마와 아빠가 나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사실을 집어내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먼저 나의 마음속 허들이 낮은 아빠에게 나의 마음을 털어놓으라는 숙제를 냈다. 허들이 낮다고는 하지만 엄마에게만 향했던 분노가 아빠에게도 번지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아빠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에겐 늘 좋은 사람이었다. 한 번도 나를 혼낸 적이 없었고, 엄마가 잔소리를 할 땐 같이 뒤에서 엄마 욕을 하곤 했다. 그렇지만 아빠는 행동이 없는 사람이었다. 늘 바쁘고 힘에 부치는 엄마와 달리 아빠는 책과 음악, 바둑과 함께 자기 세계에 빠지는 시간이 많았다. 엄마가 하소연을 해도 아빠는 공감해주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잔소리를 하고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나는 아빠가 좋은 사람이라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행동 없이 인자하기만 한 사람, 생각만 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 사람에 대한 분노가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노의 크기가 엄마에게 향한 분노보다는 작았기에 상담 선생님은 첫 숙제로 아빠를 타깃으로 잡았고, 아빠에게 작년에 만났던 남자 친구와의 연애 때문에 감정적으로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 솔직히 얘기해 보라고 했다. 또 숙제는 꼭 해가야 하는 나였기에, 숙제를 받은 나는 한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주말에 아빠와 단 둘이 차 안에서 이동하는 기회가 생겨 차 안에서 어떻게든 입을 떼어보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결국 나는 그날 입을 뗄 수 없었고, 숙제는 몇 주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 몇 주가 흐른 뒤 갑자기 나는 매우 서툰 방식으로 엄마 아빠에게 나의 감정을 표출해 버리고 말았다.
홍콩으로 돌아가기 몇 주 전, 엄마 아빠와 저녁을 먹던 시간이었다. 어떤 맥락의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늘 그렇듯 혼자 해외에 나가서 일하고 있는 내가 자랑스러우면서도 곁에 두고 있지 못해 탐탁지 않았던 엄마가 그렇게 힘들면 들어와서 결혼이나 해라 류의 잔소리를 했거나 아빠가 늘 하는 소리로 다들 힘들게 사는 거지 너만 힘든 거 아니다 류의 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 마음의 힘듦을 전혀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엄마 아빠 앞에 정신과에서 받은 심리검사 결과지를 던져버렸다. 이걸 좀 보라고, 이렇게 우울증에 걸려서 약까지 먹고 있는데 엄마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속 편한 얘기나 할 일이냐고. 1년 넘게 상담치료를 받고 있는데 그걸로도 해결이 안돼서 결국 내가 약을 먹는다고. 내가 약 먹는 거 알고 있었냐고. 엄마 아빠가 맨날 숙제처럼 살아가게 가르쳐서 뭐가 좋은지도 모르고 하기 싫은 거 억지로 꾸역꾸역 하다가, 그거 삼십몇년 하다가 결국 우울증에 걸려버렸다고. 다 엄마 때문이라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아빠도 방관자처럼 보고만 있지 뭘 했느냐고. 울고불고 소리 지르고 난리를 치르는 동안 엄마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산책을 다녀온 후 내 검사지는 조용히 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돌아보면, 그때부터 엄마 아빠는 나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려고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의 분노는 가시지 않았고, 우울증을 나약함으로 치부하거나, 도대체 뭘 얼마나 해주기를 바라는 거냐라거나 내가 언제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하며 살라고 했냐는 등 억울함을 토로하는 엄마에게 또다시 눈물로 분노로 엉엉 악악 거리며 내 감정을 분출하곤 했다.
그렇게 또 얼마간을 벌컥벌컥 화를 내며 괴로웠지만, 내 감정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겐 큰 전환점이었다.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화내기에 가까웠지만, 내 상태에 대한 전달이 가능했고 공감능력은 부족한 부모님이지만, 그래도 내 고통에 대해 서서히 이해를 해가면서, 엄마에게서 생전 처음 듣는 말들을 들으며 마음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힘들면 다 그만두고 와서 쉬어도 돼
무엇을 하는 존재(doing)가 아니라 그냥 내 존재(being)만으로 된다는 그 말. 그 당연한 말을 삼십여 년이 넘어 처음 들었다. 힘들 때마다 '다 때려치우고 쉬자'라는 생각을 스스로 하는 것과 그것을 엄마의 입에서 듣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위안이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거구나 안심되는 느낌. 잘못하거나 실패하는 게 아니구나.
그러부터 이 년여가 지난 지금, 그래서 엄마, 아빠와의 관계가 전과 달리 친밀해졌냐 하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 지금도 아빠는 나의 우울증이 결혼을 해 안정을 찾으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엄마는 내가 외국에서 퇴사를 하고 돌아와 백수로 놀고 있는 상황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아서 가끔씩 거짓말쟁이가 되곤 한다. 아직도 나와 부모님 사이엔 생각의 간극이 크다. 그렇지만 이제는 좀 덜 서툰 방법으로 내 감정을 전달할 수 있고, 가끔은 이해받을 수 있다. 너무 다른 생각에 화가 나다가도, 한 열 번의 다섯 번 정도는 엄마와 아빠가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며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다. 나머지 다섯 번은 부글부글 하며 동생과 친구들에게 하소연하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