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좋아나 Feb 27. 2022

아파트 단지를 하염없이 돌던 모녀

엄마를 연민하고 이해하기

엄마에 대한 분노의 글을 한 바닥을 써 올린 후, 엄마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된 이야기를 써보려 했지만 쉽게 써지지 않았다. 아마도 아직도 완벽히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해서가 아닐까라는 솔직한 마음을 담아 현재까지의 수용현황 정도를 써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나와 엄마의 관계는 떨어질수록 애틋하고 사이가 좋지만, 아직도 48시간 이상 같은 공간에 있기 시작하면 나는 입을 다물기 시작하고, 72시간 정도 되면 다툼이 시작된다. 분노의 시기엔 지금 내 상태에 불만이 일고 우울할 때면, 늘 엄마에게서 원인을 찾았다. 엄마가 나를 이렇게 키워서 나는 늘 애쓰고, 참고, 버티고, 힘들고, 당하며 살고 있다며 쉽게 화살을 엄마에게로 돌리곤 했다. 심리 상담을 받으며 그런 시간이 거의 1년 안 되는 기간 동안 지속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언제 엄마를 처음 이해하게 되었을까. 돌아보니 내 우울증을 거친 방식으로 털어놓은 이후, 엄마가 마음이 힘들었던 시절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였다.


우울증을 고백한 후 며칠 뒤 엄마는 돌아보면 자기도 내가 초등학교 때쯤 공황 같은 게 온 적이 있었던 것 같다고 얘기했다. 새벽에 자려고 눈을 감으면 어둠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이 괴로워서 새벽마다 아빠 몰래 집을 나가 아파트 단지를 네다섯 바퀴씩 돌다가 들어와서 겨우 잠들곤 했다고 했다. 어느 날은 가슴이 너무 아파서 종합병원에 가서 심장초음파 검사를 받아봤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아마도 그건 화병이었던 것 같다고, 그리고 그게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공황장애였던 것 같다고 엄마는 말해주었다. 많이 놀랐다. 엄마는 늘 잔소리가 많고 피곤하고 화가 많이 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슴이 짓눌릴 정도로 힘든 때가 있었다니. 엄마가 공황장애를 겪었다던 그 시기를 돌아보니 아.. 그러고도 남을 시기였다라는 이해와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사 학년 때 담도암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약 이 년동안의 시간을 병원에서 투병하셨는데, 주된 간병인은 친할머니와 나의 엄마였다. 요즘은 외부 간병인들을 많이 쓰곤 하지만, 그 옛날에는 간병인을 쓰는 것이 요즘처럼 흔한 일은 아니었나 보다. 아빠에겐 세 명의 형제자매가 더 있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아버지의 암투병 간호를 자처하지 않았고, 병시중은 당연하다는 듯이 할머니와 큰며느리였던 엄마가 도맡아야 했다. 아빠의 고향인 시골에서 작은 아빠네와 같이 살고 있던 할머니는 시골의 집과 우리 집을 오가며 지내셨던 것 같고, 엄마는 우리 둘을 키우고 본인의 일도 해가며 집안일도 하고 할아버지의 간병까지 도맡아야 했다. 특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할아버지의 배에 복수가 많이 차서 고통이 심하고 의식이 오락가락하던 때의 지친 엄마와 아빠의 얼굴은 나의 어린 기억에도 어렴풋이 남아있다. 나이가 들며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의 건강이 무너졌을 때 본인뿐만 아니라 나머지 가족의 몸과 마음, 경제적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그리고 동생과 친구들을 보며 육아의 무게감이 얼마나 무거운지, 커리어와 집안일을 병행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를 알게 된 지금, 마흔 언저리의 젊은 나이에 그 모든 것을 동시에 해내며 새벽마다 침대에 누웠을 때 그 모든 무게감이 심장을 짓눌렀던 엄마를 생각하며, 그래서 새벽마다 뛰쳐나가 걸을 수밖에 없었던 엄마를 생각하며, 해야만 하는 것들에 치여 사는 그 모습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에 이상하리만큼 강한 책임감으로 버텨내는 그 모습이 나와 너무 닮아서 한참을 새벽마다 아파트 단지 밖 둘레길을 걸어대는 엄마의 그 모습을 한참 동안 그려보았다.


엄마와 나는 같은 나이일 때 다른 시대를 살아서, 같은 시대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늘 나는 엄마의 몰이해에 화를 냈지만, 엄마는 그 옛날 나의 몰이해에 화를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늘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나의 우울증에 대해 화살을 돌리며 분노했던 나는 그때 처음 엄마도 어쩌면 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완벽주의와 과도한 책임감과 예민함은 엄마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옛날 새벽마다 아파트 단지를 하염없이 돌았던 엄마는, 코로나 시기에 우울증과 함께 재택근무를 하며, 마음이 너무 답답할 때마다 죽지 않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뛰쳐나가 엄마가 하염없이 걸었던 아파트 단지를 똑같이 걸으며, 라일락 나무 밑에서 심호흡을 하며 굳어있는 폐를 풀어내곤 했던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엄마와 감정에 대한 대화를 시작하면서 엄마에 대한 연민이 생기고, 엄마를 이해해보기 시작하면서, 엄마에 대한 분노는 서서히 누그러져 갔다.


엄마도 이 라일락 나무를 보며 걸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기승전(轉) 전전전(戰戰戰)의 시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