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이해하기
얼마 전 홍콩에서 친했던 친구들 두 명과 함께 남한산성에 다녀왔다. 한 친구는 나와 한 달 간격 차이로 홍콩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친구였고, 다른 한 친구는 한국에서 잠시 재택근무를 하러 들어왔다가 홍콩의 팍팍한 락다운 정책에 네 달 째 한국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었다(2년 전 나의 상황과 비슷한 셈).
몇 년 간 내게 봄은 늘 가혹했다. 3년 전 봄에는 상담을 시작했고, 2년 전 봄에는 우울증 약물치료를 시작했고, 작년 봄엔 퇴사를 결정했다. 2년 전 봄에는 일기장 가득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T.S. 엘리엇의 시를 적어보곤 했었다. 삼 년 간의 잔인한 봄을 겪은 후라 그런지 올해 봄도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반갑지 않다기보다 봄이 오는 것을 막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봄이 왜 싫은가에 대해서 나의 최애 유튜버 '원지의 하루'의 원지님처럼 한동안 <고찰>도 오래 해봤었다. 그 내용은 따로 써보기로 하고.
삼년간의 재앙처럼 잔인했던 봄이 또 찾아오는 것이 싫어서 한 동안 밖에 나가지 않았다. 창 밖에 연둣빛 나뭇잎들을 보는 마음이 좋지 않아서 친구들이 가자는 봄놀이에도 시큰둥했다. 그러다 재택근무를 하러 들어왔다가 몇 달간 붙잡혀있던 친구가 곧 홍콩으로 돌아갈 날이 돌아왔다. 좋아하는 친구라 돌아가기 전 꼭 보고 싶은 마음이 우선하여 홍콩에서 한창 하이킹을 다닐 때부터 약속했던 남한산성 등산을 하기로 했다. 봄날 나들이객 차량에 파묻혀 친구들은 약 세 시간 만에 시속 20km의 속도로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등산을 하고 밥을 먹으려던 계획은 당연히 그 순서가 바뀌게 되었다. 닭백숙을 한가득 먹고 등산을 시작한 터라 올라가는 발걸음이 쉽지 않았지만, 간만의 하이킹과 내가 사랑하는 친구의 유머와 재치, 또 다른 사랑하는 친구의 배려와 스마트함에 감동받으며 오래간만에 정말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해외에서 한국인과 친해지는 걸 경계해야 한다는 말들을 여러 통로로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홍콩에서 만난 한국 친구들은 길어 봐야 2년가량의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시간 대비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많이 친해졌다. 해외생활과 코로나, 홍콩의 힘든 락다운 정책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거의 같은 동네에서 자취하는 대학생, 또는 홍콩 버전 시트콤 프렌즈와 같은 찐한 생활을 삼십 대가 되어서 경험하고 돌아온 느낌이다.
친구들은 우리의 관계가 생성된 중심에 내가 있었다고 얘기하곤 하는데, 정말로 그 근원엔 나의 강한 의도와 의지가 있었다. 상담을 받으며 사람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상담을 받기 전엔, 어느 순간 사람과 친해지면 반드시 언젠가 실망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이십대부터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생각이 굳어진 지 몇 년, 상담을 시작하게 되었다. 상담치료를 받으며 삶에 가장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한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간 나는 사람과 외적인 갈등이나 그 사람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생겨날 때, 그 사람에 대한 욕을 안팎으로 하거나, 상처가 쌓이면 결국에 그 사람을 끊어내는 방식으로 해결해 버리곤 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은 실망스럽다는 결론을 내며 인간 회의론에 이르곤 했는데, 상담치료를 받기 시작한 이후에는 상담 선생님이 나를 이해하기 위해 적용하셨던 방법들을 타인에게도 적용해 보면서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시작해보니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상담치료는 주로 프로이트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나의 과거, 특히 부모님에게서 기인한 원인들을 찾아보는 방식을 통해 남을 이해하려 노력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완벽주의에, 매일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 일하는 워커홀릭이며, 이메일의 오타 하나, 글씨체 다른 것 하나까지 다 집어내는 상사 때문에 괴롭다고 가정해보자(실제 경험담이며, 나 또한 어느 정도는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이 아이러니). 예전이었다면 회사 메신저 가득히 지엽적인 거 가지고 이랬네 저랬네 하며 동료들과 매니저 욕을 실컷 해댔을 것이지만(지금도 전혀 안 한다는 건 아니다), 상담 이후엔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호기심이 생기니 대화 속에 궁금한 질문들을 녹이게 되었다. '상무님의 어머니는 어떤 스타일이세요?' 라던가 '학창 시절에 어떤 학생이셨어요?'와 같이 그 사람의 성장 시절을 파악해 볼 수 있는 질문을 해본다. 답변에서 상사의 어머니는 항상 시험 전 날, '완벽하게 공부했니? 정말 완벽하게 다 한 거 맞니?'라며 두 번 세 번씩 완벽에 대한 다짐을 받곤 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대입에 실패하자 상사는 몇 달 동안 문밖으로 나오지 않을 만큼 실망했었다는 것 같은 단서들을 파악하게 되었다. 이 단서들을 통해 성장과정에서 어머니로부터 성취에 대한 압박이 심했으며 완벽주의와 강박을 가질 수밖에 없었겠구나 짐작해보는 것이다. 또한 점심을 먹으며 나누던 대화 속에서 그녀가 언뜻 비추었던 고위 공직자인 큰동서에 대한 시어머니의 차별에서 오는 서운함을 통해 성취와 인정 욕구와 강한 자존심이 지금 그녀의 워커홀릭 삶의 동력이구나 이해해 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고 사람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노력을 홍콩에서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코로나로 몇 달간 한국에 머물면서 엄마를 서서히 이해해가게 될 즈음 다시 홍콩으로 돌아갈 용기가 생겼다. 우울증 약을 복용한 것도 몇 달 되어서 서서히 효과도 나타나기 시작해서 다시 타지 생활을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 홍콩은 그 때나 지금이나 꽤나 강력하게 코로나 통제 정책을 행사하고 있어서 지난달까지만 해도 모든 입국자들은 내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호텔에서 자비로 14일 동안 격리를 해야 했다. 코로나 상황에 따라 그 격리기간은 21일일 때도 있었고 지금은 7일로 줄은 것으로 알고 있다(왠열). 당시엔 집에서 14일 동안 격리를 해야 해서 거의 4개월 동안 비운 집에 대한 걱정을 가득 안고 홍콩으로 향했다. 집은 걱정보다 매우 멀쩡했다. 홍콩에서 처음 알게 된 한국인 동생이 홍콩인 남편과 내가 오기 전에 집을 한번 싹 청소해 준 덕분이었다. 가기 전 집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집 한번 둘러봐만 달라고 했던 것이었는데 집 문을 열었을 때 깔끔한 집의 형체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나의 미리 걱정하며 마음을 불안으로 잠식시키는 버릇의 무용함은 이렇게 주변인의 예상치 못한 도움으로 인해 깨달아지기도 한다. 곰팡이 슨 몇 가지 옷과 가방 정도 쓰레기봉투에 버리고 나니 다시 내 터전에 돌아왔다는 마음이 들었다.
코로나와 함께 급속도로 발전한 홍콩의 배달문화 덕분에 요리도 하고 배달음식도 시켜먹으며 14일을 그럭저럭 보냈다. 약 덕분인지 폐쇄공포증은 다시 몰려오지 않았다. 재택근무는 계속되고 있었고 오후 6시 이후에 모든 식당은 테이크아웃밖에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인 답답함은 지속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다시 이 답답한 마음을 들이지 않으려면 내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기 전 몇 번 만나서 안면을 텄던 친구들을 격리가 끝난 주의 토요일에 집으로 불렀다. 한국에서 사 온 막창으로 Welcome back 파티를 열기로 했다. 내향형인 인간인 나는 모임을 주최하거나 주도하는 일을 인생에서 거의 해 본 적이 없어서 상당한 마음의 각오가 필요했다. 다들 부담스러워하면 어떡하지? 재미없어하면 어떡하지? 하는 여러 고민으로 마음은 시끄러웠으나 더 이상 집에서 아무도 못 만나고 갇혀서 살 수는 없다는 경험을 통한 고통이 그 고민을 이겼다. 내추럴 와인을 잔뜩 시키고 한국에서 사 온 막창을 에어프라이어에 굽고 된장찌개를 끓이고 종갓집 장녀의 유일한 기술을 활용해 전을 몇 가지 부쳤다.
다행히 홍콩의 융통성 없는 코로나 정책으로 사람이 그리웠고, 나와 마찬가지로 모임의 initiator는 되지 못하나 active follower인 나의 친구들은 토요일에 참석을 즐겁게 수락했고, 오래간만에 먹는 한식 집밥에 감사해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점심 즈음 만난 친구들은 저녁까지 시켜 먹고 거의 자정이 되어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우리는 다음 주 토요일에는 함께 집에서 초밥을 테이크 아웃해와서 먹자는 약속을 했다. 평일 내내 재택근무를 하며 업무와 생활이 이상하게 섞여서 일하다 청소기를 돌리고, 일하다 점심 배달을 주문하고, 일하다 먹고, 일하다 쓰레기를 버리러 가고, 일하다가 설거지를 하는 월요일 오전과 목요일 저녁이 다를 바가 없는 5일을 보내면서 친구들과 보낼 토요일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다음 주에 친구들은 오후 2시쯤 도착했다. 새로운 친구가 와인을 한 병들고 왔고, 테이크 아웃해 놓은 초밥세트가 우리 집 거실의 좁은 책상 겸 테이블에 놓였다. 그 전날 슈퍼마켓에서 사 온 레몬을 썰었고, 오이를 감자칼로 얇게 포를 떴다. 오이를 투명 컵에 두르고, 핸드릭스진과 토닉워터를 따르고, 레몬을 끼웠다. 그렇게 두 번째 토요일의 초밥 파티가 시작되었다. 모두들 재택근무나 학교-집만 왔다 갔다 했던 평일 후 토요일의 만남이 즐거웠는지 다들 집에 가지를 않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코로나 시기에 만났다는 특수성 때문에 하소연할 것들이 가득했다. 시위 이후에 닥쳐온 코로나, 언어의 장벽, 한국과 다른 문화, 두고 온 가족, 커리어에 대한 걱정, 연애에 대한 걱정. 본인의 걱정을 이야기하면서 서른이 넘어서 만난 우리들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아니 나의 경우엔 이기적이게도 더 깊이 이해시키고 싶은 마음에 우리의 지난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주로 나와 몸이 안 좋은 와이프를 한국에 두고 홍콩에 연구를 하러 온 J가 말이 많았다. 상담을 받으며 내가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같은 방식으로 나를 남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해야겠구나를 깨달았다. 그리고 남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담 선생님이 나에게 물었던 것들을 알아야겠구나 생각했다. 홍콩에서 내가 마음에 둘 집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시작한 모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한 사람 한 사람 친구들에게 궁금증이 있었다. J에게는 그 작업이 쉬웠다. 내가 나에 대해 이야기 한만큼 J도 살아온 많은 얘기를 나눴다. 주로 나와 J의 대화 점유비율이 높았다. 항상 J의 선택을 지지해주는 현명한 엄마가 있어 항상 집에 가서 엄마와 수다를 잔뜩 떨곤 했었고, 엄마에 비해서는 성취에 대한 압박을 주었던 아빠가 있었다는 J의 얘기를 들으며, 주저 없이 자신을 많이 노출시키며 얘기하고 사소한 감정에 공감을 잘하면서도 일에 대해 해내려는 마음을 놓지 않는 모습이 이해가 갔다.
항상 에베레스트처럼 높은 나의 이상처럼 모두와 다 터놓고 모든 것을 얘기하는 것은 어려웠다. 어떤 친구는 거의 듣기만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깊이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기도 했다. 나와 J의 높은 대화 비중에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끼며 불편했던 나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이런저런 질문들을 하기 시작했지만, 말을 하라는 강요 역시 폭력일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또 어떤 친구는 불안과 강박이 높아 보여서 친구의 성장과정에 궁금증이 일었었다. 친구는 모서리에 집착한다거나 택시나 페리 등을 탈 수 없는 등 교통수단에 대한 강박이 있다고 했다. 나는 주변에 열심히 살아가는 모범생 많은데 친구들이 , 그중 상당 수의 친구들은 우울증을 앓거나 공황 또는 불안장애를 겪고 있다. 나 또한 우울증을 몇 년 간 겪고 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정신적 힘듦을 겪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연민을 느낀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엄마와 아빠 모두 나의 친구에게 매우 성취 위주의 삶을 강요해왔고 부모님 역시 해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더 나은 성취를 향해 옮겨 다니며 살아온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는 듯했지만, 성취만이 인간으로서의 인정과 이성의 관심 또한 이뤄낼 수 있다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며 그게 아니라는 그 자리의 친구들의 반박에 대해 자신이 논리적으로 패배해 그 사실을 마침내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저녁시간 식당이 열지 않는 락다운 기간 동안 우리는 매주 토요일 두 시에 함께 밥을 먹으며 대화를 하는 집단 상담 모임을 3개월간 이어갔다. 모임의 이름은 2PM이었고, 늦은 점심과 저녁을 먹으며 끝도 없는 수다를 떤 후 아이들은 택시를 타고 2AM 쯤 돌아가곤 했다. 그 기간 동안 매주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은 나에게 설렘이기도, 공간을 내어주어야 하는 압박이 되기도 했다. 매주 12시간 동안의 대화, 총 백시간은 족히 넘을 법한 집중적인 집단 상담 기간은 해외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지 않은 우리에게, 닥쳐온 코로나 락다운을 버텨나갈 수 있는 소속감이 되었고, 한국이었다면 더 오랜 기간이 걸렸을 서로에 대한 친밀감과 이해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해주었다. 2PM 모임을 지속하면서 나는 나의 우울증과 약복 용도 알렸으며,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이유로 나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공감해 주는 친구들 덕분에 나는 우울증을 자조적 유머 코드로 활용할 만큼 마음이 편해졌다. 어떤 관계 안에서 우울증을 밝힌 것이 거절감이 아닌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여진 이 경험은 나중에 회사나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내 우울증을 비교적 쉽게 알릴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대화를 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고 연민이 생긴다. 적어도 싫어하지는 않을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나의 어두운 시절, 와인과 함께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했던 홍콩에서 만난 나의 친구들은, 매우 글로벌한 사람들이라 서로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을 시간은 앞으로 얼마나 될지 예상할 수 없지만, 어디서든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고, 기회를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시간을 만들어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