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조정과 과잉해석
약물치료를 종료하는 즈음해서 명상 프로그램을 등록했다. 사람은 몸이 아플 땐 병원에 가고, 평소 운동을 위해서는 피트니스 센터와 같이 운동할 수 있는 곳에 찾아가거나 보다 본격적으로는 PT(Personal Training)을 받을 수 있다. 운동에 습관이 잘 되어있다면 혼자서 홈트나 달리기를 할 수도 있겠다. 나 또한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때 PT를 3년 정도 받았던 적이 있다. 보통 PT는 몇 달 하고 운동하는 법을 배워서 혼자 운동을 한다는데, 나의 경우엔 운동이 전혀 습관이 되어있지 않은 시절이라 남과의 약속은 어기지 못하는 나의 성격을 활용하여 PT 선생님과의 약속응 지키는 방식으로 운동을 해나갔다. 다행히 그 시간 동안 운동에 습관이 들어 다른 운동을 기웃거리다 요가에 정착하게 되었고, 최근 4-5년간은 꾸준히 요가를 수련해 나가고 있다. 요가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 건강에도 주는 효과가 상당해서, 아마도 내 일생의 반려 운동으로 요가는 늘 함께 할 것이다.
몸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듯, 나의 경우에는 마음이 아팠었기 때문에 마음 건강에도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힘듦을 느꼈을 때 상담을 받기 시작했고, 우울증이 깊이 찾아왔을 때 정신과에 찾아가 약물치료를 시작했듯이 약물을 치료가 종료되는 즈음 해서 스스로 마음을 돌볼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여러 요가와 명상센터들을 찾아보다가 MBSR(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 마음 챙김에 근거한 스트레스 완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신건강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존 카밧진 박사가 창안한 MBSR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Mindfulness는 '마음 챙김'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마음 챙김이라는 단어로 들어보았을 수도 있다. Mindfulness란 불교명상에서 활용되는 고대 명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MBSR의 창시자인 존 카밧진 박사는 마음 챙김을 '독특한 방식으로 -의도를 가지고, 현재 이 순간에, 판단하지 않고-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생겨나는 자각'으로 정의하였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마음속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 순간에 어떤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고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요가에서도 늘 강조하는 것은 현재의 나의 호흡을 바라보는 것이다. 언제나 바쁜 우리의 뇌는 늘 우리를 과거나 미래로 데려다 놓는다. 과거에 집착하면 우울이 오고, 미래에 집착하면 불안이 온다고 했다. 지금 현재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모든 명상의 기본이다.
나는 우울증을 겪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을 받고, 한 달에 한 번씩 정신건강의학과에 찾아가며, 그 사이사이 갑작스러운 마음의 힘듦이 찾아올 때 명상을 시도해 보곤 했었다. 주로 명상 어플이나 명상 팟캐스트, 명상 유튜브와 넷플릭스(!) 정도를 활용했었다. 넷플릭스에서 명상을 한다니 놀랄 수 있겠지만, 넷플렉스에 있는 헤드스페이스 시리즈 '명상이 필요할 때', '마음을 챙길 시간', '숙면이 필요할 때'를 필요에 따라 활용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매일 일정 시간에 하면 습관을 들이기에도 좋고, 성우들 목소리가 좋아서 목소리를 듣는 즐거움도 있다. 명상 팟캐스트와 어플로는 '마보', 유튜브는 지대넓얕의 김도인 님의 '도인 명상'이나 요가 명상으로 검색해서 필요할 때마다 시도해 보았었다. 요가의 호흡명상(pranayama)도 도움이 된다. 홍콩에 있을 때 요가 센터에서 배운 아눌로마 빌로마(Anuloma viloma)와 카팔라바티(Kapalabhati)가 도움이 되었다. 특히 호흡명상은 호흡과 숨이라는 집중할 대상이 명확하게 느껴져서 나에게 더 효과적이었다.
정신건강을 위한 방법을 찾다 보면 종교가 개입되는 경우가 많다. 마음의 힘듦을 종교를 통해 치유받는 경우도 많고, 명상 역시 불교나 힌두교에서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무언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채로 빠져들지 못하는 나로서는 여러 종교 서적들을 기웃거려보다가 그 방대함에 질려 종교로 결론이 나지는 못했다. 결국 데이팅 어플의 자기소개도 아니고 spiritual but not religious 한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종교적 색채를 배제하여 마음도 편안한 MBSR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특히 마음의 번영감(Flourishing)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Flourishing’ 이라는 단어에 크게 혹했다.
그동안 여러 채널을 통해 명상을 접해오면서 마음 챙김이라는 것에 대해 대략의 감 정도는 잡고 있는 상태라 좀 더 본격적인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다. 그러던 와중에 우울증 환자의 재발방지를 위해 개발된 MBCT(Mindfulness Based Cognitive Therapy)를 알게 되었고, 나는 그것의 좀 더 일반화된 버전인 MBCT-L(Mindfulness Based Cognitive Therapy for Life) 프로그램을 신청하였다. 8주의 프로그램 중 3주 차까지만 들은 상황이라 아직 이르지만, 생각보다 만족스럽다. 혹시나 너무 당연한 내용들 만을 다룰까 봐 환불규정까지 물어보고 등록한 프로그램이었는데, 다행히 중간에 그만두거나 할 일은 없을 것 같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심정이다.
지금까지 MBCT-L 과정에서 배운 내용 중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자동조정모드(auto-pilot)에 관한 것이다. 이 자동조정모드는 내가 우울증을 앓으면서 가장 뚜렷하게 보였던 왜곡된 사고의 흐름이었다. 가장 크게 깨달았던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홍콩에서 한창 재택근무를 하던 시절, 팀 미팅에서 내가 진행했던 마켓 리서치 결과를 분석하여 발표를 하게 되었다. 우리 팀은 약 열 명정도 각 국가의 사람들이 모두 짬뽕되어 있는 팀이었는데, 그중에 나는 가장 쪼랩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director 이상의 직급을 가진 업계 짬밥 20년 이상의 베테랑들이었다. 아마 그들도 일부는 각 국가 지사에서부터 일해서 regional headquarter까지 일하게 되었겠지만, 나는 나름 한국에서는 십여 년 일한 짬이 있었음에도 그곳에서는 다시 햇병아리 신입이었다. 게다가 나는 우울증도 앓고 있는 심신 미약의 상황. 안 그래도 큰 발표에 스트레스를 받던 와중에 마이크로 매니지의 달인 매니저가 한 수 거들기 시작했다.
"좋아나 님, 이거 부서장에게 어필할 굉장히 좋은 기회인 거 알죠? 미리 리허설 여러 번 하고 들어오고,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 다 생각해 보고 와요. 혹시 필요하면 내가 리허설하는 거 도와줄까요? "
안 그래도 발표 공포가 있는 나는 매니저의 리허설 도움은 거절한 후, 무려 다섯 번의 셀프 리허설을 해본 후 발표를 시작했다. 비대면 회의의 장점이 무엇이던가. 보험으로 발표 대본까지 따로 띄워놓고 연습한 대로 발표를 잘 마쳤다. 발표 자체는 지금 생각해도 매우 훌륭했던 것 같다. 그 후 가장 두려웠던 질의응답 시간. 어렵지 않은 팀원들의 질문에 쉽게 답변을 할 수 있었다. 마지막은 팀 미팅 종료를 1분 앞둔 부서장의 질문이었다. 아직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질문의 내용이 대략 "이 마켓 리서치 조사를 통해 태국 시장에서는 어떻게 전략을 짜야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내용이었것 같다. 처음에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서 나는 다시 한번 질문을 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두 번째로 질문을 반복했을 때 대략 질문을 이해하긴 했지만, 답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어버버버버 하던 와중 부서장은 "아, 좋아나. 미안한데 이제 회의 시간 끝났으니, 나중에 팔로 업하는 걸로 하자.” 하고 급히 회의를 끝냈다.
이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들었을 것 같은가?
지금의 나라면 ‘아 발표 끝나서 후련하네. 마지막 질문 이따가 생각해보고 메일로 보내놔야지~’ 정도가 아닐까 싶다.
당시의 나는 이 미팅이 끝나고 30분을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발표를 망쳤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발표가 끝나자마자 한국인 상무님이 나에게 보낸 "좋아나 님, 발표 two thumbs up! 너무 잘했어요!"라는 메신저 메시지를 나는 나를 위로하는 메시지로 해석했다. '아, 내가 발표를 망친 것이 안쓰러워서 이렇게 위로해 주는구나.' 이 메시지가 칭찬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틀 뒤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깨달았다. 총 1시간의 시간 동안 나는 50여분의 발표를 너무나 잘했고, 10분의 질의응답 시간 중 단 하나의 질문에만 대답을 못했다는 것이 사실(fact)이었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나는 이렇게 자신이 충분히 훌륭했던 사건에도 전체적인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지엽적인 한 가지 실수에 집착하여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나 자신을 실패자로 후려쳐 버렸다. 이것이 바로 '자동조정모드'의 전형이다.
나는 우울증을 심하게 겪을 때엔 이렇게 현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내 머릿속에서 멋대로 상상을 해버리는 경우가 더욱 잦았다. 남의 말과 행동을 공격으로 곡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행동에 대해 칭찬보다는 비판을 받는 데에 익숙한 성장과정을 보내와서 내 상황에 부정적인 사고 흐름이 대부분 우세한다. 어떤 상황을 상상할 때 늘 최악을 상상하면 그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어릴 적부터의 습관도 한몫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 상황을 감각함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반응해 버리는 생각을 잠시 바라보고 그 사이의 공간을 찾는 것이 바로 '알아차림'이다. 이 '알아차림'을 통해 우리는 자극과 반응 상이의 자동조정, 즉 번져버리는 생각을 멈출 수 있다. 그리고 상황을 그 상황 그대로 감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주변에 나의 우울증을 숨기지 않은 탓에 꽤 많은 정신건강 관련 상담 전화들이 걸려온다. 최근에는 친구가 지인이 망상이 너무 심해졌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정신과 선생님을 추천해 달라는 전화를 해왔었다. 주변 사람이 갑자기 자신을 공격하려고 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는 것이 대략의 망상의 내용이었다. 상황이 대강 그려지면서 친구의 지인의 마음 또한 어떤 흐름을 통해 그런 생각에 미쳤는지 이해가 갔다. 그리고 바로 이 자동조정모드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뇌는 누구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의 왜곡을 가한다. 우울증에 걸린 뇌는 아프게도, 조금 더 나에게 가혹한 쪽으로 왜곡을 하곤 한다. 이런 뇌를 가진 사람에게 하는 '너는 왜 내 의도를 오해해?' 라던가 '너는 왜 상황을 과도하게 해석하니?'라는 말은 큰 상처가 되었다. 우울증인지 아닌지 그 경계가 모호한 현재에 사는 나는 아직도 이런 말에 상처를 받는다.
남을 조정할 수 없으니 결국 우울증에 걸린 우리는 나를 바꿀 수밖에 없겠다. 자동조정모드에 벗어나는 연습을 하자. 눈을 감고 1) 현재 어떤 감각과 감정, 생각이 흘러가는지 바라본다. 2) 호흡이 잘 느껴지는 한 점(배나 코)에 집중한다. 3) 의식을 점에서 몸 전체로 넓히며 몸 전체를 살펴본다. 현재를 느끼며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이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 아닌지, 내가 생각하는 현재가 내가 만들어낸 감옥이 아닌지 알아차려보자.
나 역시 마음 챙김에서 갈길이 너무나도 멀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급하게 글을 전하는 이유는 나와 같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내가 만든 괴로움에 갇혀있는 걸 깨닫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몸의 건강처럼 마음의 건강도 노력하면 찾아온다. 나 역시 3년간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나아졌고, 더 나아지리라는 믿음이 있다. 나 같이 부정적인 사람이 이 정도면, 여러분도 할 수 있다. 내가 만든 지옥은, 내가 지워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