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같이 일어나 아침 7시 콘퍼런스 장소로 모인다. 모인다는 말보다 7시 이전에 병원으로 출근을 해서 콘퍼런스 장소에 도착해야 한다. 강의실에서 수업만 듣던 시절이 그립다. 역시나 병원이라는 곳은 시작부터 힘든 곳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저널 발표를 듣고 환자에 대한 발표도 한 후 모두 우르르 회진을 나선다. 레지던트 선생님이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가고 뒤따라 교수님, 그리고 학생이 주르륵 회진을 한다. 나의 첫 대학병원 실습에 대한 기억이다.
병동에 가면 처음 두툼히 쌓인 커다란 종이봉투에 넣어 있는 X-ray 사진을 뷰박스라고 하는 불빛이 나오는 상자에 끼어 차례로 본다. 여기서 레지던트 선생님의 잽싼 손놀림과 동시에 환자에 대한 브리핑도 함께 이어진다. 동시에 교수님은 환자 차트를 함께 보신다. 차트에는 환자의 생체징후 즉, 혈압부터 체온 등이 나온 첫 페이지부터 각종 혈액검사 결과지 등이 들어있는 차트를 본다. 물론 학생들은 살짝 반발짝 물러난 곳에서 교수님과 레지던트 선생님들의 말씀과 얼굴을 번갈아가면서 본다.
이어 병실로 환자를 직접 보러 간다. 몇 분 전 본 차트 기록, 영상검사 등이 환자 얼굴과 매칭이 되어야 하는데 학생인 나는 도무지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나 교수님은 환자 얼굴에 X-ray 가 있는 것처럼 물 흐르듯이 환자를 진료하며 설명하신다. 학생의 주 입무는 회진에 방해가 안되게 최대한 투명 인간처럼 그 흐름에 따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중간중간 주옥과 같은 말씀들을 머리에 담아야 한다.
마지막 회진은 중환자실이다. 중환자실에서는 환자 바로 앞 테이블에 차트, 중환자실 시트라는 커다란 종이, X-ray 사진이 함께 있다. 그래도 일반 병실보다 환자 바로 앞에서 보니 바로 매칭이 된다. 그러나 중환자실 환자는 의사면허에 다가가기 멀리 있는 나에게는 너무 어렵고 두렵기까지 하였다. 몸에 달린 관도 수없이 많고 과연 이 환자가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의대생 병원 실습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환자 배정, 그리고 그 환자에 대한 발표이다. 교수님이나 치프 레지던트 선생님께서 해당 과에 가장 대표적인 질환을 가진 환자를 케이스 발표 대상으로 지정해 준다. 그러면 학생인 나는 다시 처음부터 그 환자의 기록, 차트, 검사, 영상 검사 등을 병동에 직접 가서 보고 파악한다. 눈으로 안되기에 하나씩 다 적어서 기록한다. 마지막으로 환자에게서 다시 병력 청취부터 청진도 한번 해보는 의대생 실습 역할을 한다. 그 순간이 가장 떨린다. 솔직히 학생 신분이라고 밝히고 가기도 그렇고 흰색 가운을 입었기에 환자 입장에서 의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처음이기에 아무리 준비를 다 해서 환자에게 가서 직접 진료, 청진 등을 하여도 매번 빼먹는다. 다시 뒤돌아가서 차트를 한 번 더 보고 환자에게 또 가보고, 하루 종일 병동에서 서성인다. 그러다 X-ray 뷰박스가 비어있으면 슬쩍 거기에 환자 X-ray 사진도 한번 끼어 넣고 보면서 뭐라도 하나 더 알아내려 한다.
그렇게 꾸역꾸역 준비를 마치고 빳빳한 A4에 케이스 리포트를 만들어 교수님 앞에서 발표한다. 역시나 오늘도 무지막지하게 지적당하면서 좌절한다. 하지만 친절하신 교수님을 의기소침해 있는 학생들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면서 다시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신다.
2.
전자의무기록, EMR ( Electronic medical record)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모든 의무 기록이 전자 문서화된 것이다. 나도 면허를 취득 후 십여 년 수기 차트를 썼다. 악필이 드러나는 기록이지만 내가 본 환자들에 대한 기록을 적었다. 정성껏, 그리고 빠짐없이 솔직히 하라고 선배 의사들로부터 배웠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순식간에 전자 차트로 모두 바뀐 뒤로는 조금 혼란에 빠졌다. 내가 쓴 수술기록지가 이 서버를 접속하는 의료진 수십 명이 동시에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어색하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기에 나름 전자의무기록에 적응하여 살아간다.
편리하게 이용하는 것을 잘 사용하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나 반대로 악용하는 경우 그것은 더 큰 문제가 된다. 즉 환자에 대한 모든 기록이 모니터를 통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환자의 혈압부터 모든 생체 징후, 각종 검사 결과 등을 모니터를 통해 본다. 누워서도 환자에 대한 대다수 정보를 볼 수 있다. 요즘은 모바일 EMR 도 나와 핸드폰에서도 이런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환자 기록은 오로지 환자가 입원해 있는 병동, 그리고 중환자실이라면 환자 발끝에 있는 것이다. 환자와 그 기록, 옆에 의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이제는 너무 떨어지게 된 것이다. 직접 보지 않고 모니터로 환자를 보기 시작하였다.
전자의무기록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을 통해 환자에 대한 검사, 기록들을 보지만 환자는 눈빛, 숨소리까지 직접 보는 것은 아니다. 환자 말을 직접 들을 수도 없다. 병원에서 주로 쓰는 '노티 하다' '보고하다'라는 말은 다른 의료진을 통해 전화로 환자 상태를 보고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내가 환자를 직접 보지 않기에 환자의 숨소리, 눈빛, 피부 상태, 부종 등 여러 가지를 간과하게 된다.
3.
내가 학생 신분으로 실습을 하던 시절, 그리고 EMR 기록이 너무 완벽해진 현재까지 시점 사이가 강산이 두 번 변해버렸다. 내가 그만큼 나이가 먹었다는 것이고 세상도 변하고 또 의사들도 많아졌다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나라는 점점 고령화, 노인 인구와 동시에 아픈 환자들도 많아졌다는 것이다.
편리해진 것과 의료가 발전하는 것이 항상 함께 간다는 것은 아니다. EMR, 그리고 수많은 최첨단 의료 기계가 제아무리 편해진다 해도 환자의 눈빛, 숨소리를 직접 보는 것만큼 환자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나의 질문에 한참 후배 의사가 그럴듯하게 대답하고 있다.
'환자 상태는 지금 이러이러합니다.'
'그래서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다음은 말문이 막혀 어찌할 바를 몰라한다. 역시 환자를 모니터로 본 의사면허증에 잉크가 반쯤 마른 어느 후배 의사 이야기다.
이런 한참 후배 의사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한숨이 나오는 나를 보면서 이제 나도 꼰대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요즘 누구나 젊은 세대, MZ 세대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절대 금기라고 한다. 하지만 외상외과 의사 나는 딱 한 번만 꼰대가 되려 한다.
'환자를 직접 보고 말하세요!'
누구나 다 환자가 될 수 있고 그 환자가 누군가의 가족일 수 있다. 나를 치료해 주는 의사가 모니터로 나를 보지 않고 직접 와서 얼굴 보는 의사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