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15분이 나에게 15시간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나름 10km, 하프 마라톤도 완주한 경험도 있는 내 몸이 순간 이렇게 되었다니 걸어오는 순간 자괴감에 빠진다.
나는 내 몸을 혹사, 갉아먹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출근길은 그래도 발걸음이 가볍다.
집에서 잠과 휴식으로 충분히 충전을 하고 전쟁터로 나가는 길이다. 걸어서 10분, 차와 주차타워 주차 완료까지 12분. 그래서 나는 걸어서 출근한다. 횡단보도를 세 개 건너야지 내가 24시간 전쟁을 치를 곳으로 출근한다.
퇴근은 다른 방향 길을 선택한다. 횡단보도 개수는 세 개로 같지만 24시간 전쟁을 치르고 퇴근하는 길은 이왕이면 사람들이 분주하게 다니는 길을 선택한다. 피곤에 찌들고 쓰러질 것 같은 나에게 오전 시간 활발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힘을 얻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전날 오전 7시 출근, 그리고 퇴근은 빨라야 다음날 오전 11시. 같은 건물 안에 28시간 있어야 하고 밥을 세 번 먹어야지 나는 비로소 퇴근을 한다. 하지만 퇴근하는 발걸음은 그리 경쾌하지도 기쁘지 않다. 환자들 상태가 아주 심각하지 않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지만 퇴근길 중간에 애매하고 찜찜한 환자에 대한 보고 전화가 온다. 순간 생각한다. 지난 28시간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내가 담당, 내 앞으로 있는 환자. 그리고 우리가 봐야 할 환자, 또 다른 환자들 모두에게 최선의 치료를 위해 노력해 주었다. 이제는 나를 위해서 최선의 치료, 즉 휴식과 안정을 해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향한다. 꾸역꾸역. 천근만근 몸과 발을 이끌고 집으로 간다. 내 몸은 이렇게 무겁지만 활기차게 오전 일을 하는 사람들 모습을 보면 그들의 기운은 느껴본다. 그 기운을 보고 느끼고 함께 더 살아나려 하지만 내 발걸음은 더 무뎌진다.
젠장 오늘따라 발이 이상하게 보도블록과 더 달라붙는 느낌이다. 방금 전 새로 보수공사한 아스팔트 끈적이가 신발 바닥에 묻는 것 같다. 오늘은 아스팔트까지 나의 피곤을 더 무겁게 하고 난리다.
2.
출근할 때 10분 걸어서, 예정된 퇴근 시간은 15분. 하지만 오늘은 피로의 무게와 아스팔트 괴롭힘까지 더해져서 20분도 훌쩍 더 걸려 집으로 도착했다. 집의 편안함 휴식, 충전의 이유는 내 집이라는 그 자체다. 내 집에는 내가 살고 있는 곳, 그리고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먼 곳에 일이 있더라도 늦은 밤 집안에 들어오는 순간 피로가 풀리고 아늑함, 안심이 되는 것이 그 이유다.
바로 쓰러질 듯이 집 현관을 들어왔다. 다행히 오늘은 집에 가족이 있다. 가족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 그 자체다. 내 머리, 어깨 위에 앉아 내가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는 그들이 나에게 주는 행복 크기가 훨씬 크기에 나는 그 무게를 견뎌낸다. 나 혼자만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견디며 함께 가야 하는 것이 가족인 것이다.
'오늘은 안 피곤해 보이는데......?'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쓰리고 바로 그 자리에 쓰러질 것 같다. 지난 28시간 동안 집을 떠나 있으면서 내 손을 거쳐간 피, 환자들의 고통 소리들, 쉼 없이 울린 모니터 알람 소리들까지는 무엇인 가? 아주 조금 쪽잠을 잔 구석 당직실의 침대는 나에게 무엇인 것인가?
'안 피곤해 보이는데'라고 말하는 의미를 나는 모르겠다. 안 피곤해 보이니까 집안 청소, 빨래, 집안일을 더 하라는 것인가? 내 모습이 안 피곤해 보여 다행이라는 뜻인가? 내 눈빛, 얼굴빛을 보고 나에 모든 것을 안다는 의미일까? 그 말을 듣고 다시 곱씹어 보는 이 순간에도 내 입술을 갈라지고 타들어 간다.
이렇게 쓰는 자체, 생각하는 자체가 나에게 또 고통이고 괴로움이다.
그래 쉽게 말해 내가 지금 이 일을 안 하면 그만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것을 안 하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도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다 집어던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하지만 나에게 떠나고 회피하고 도망치는 것이 정답이 아닐 것이다.
3.
역시나 사람은 혼자 사는 동물이다. 혹자는 사회적 동물, 타인과 어울리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삶이라 하지만 나는 반데일세.
반쪽,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그리고 제아무리 누구라도 내 마음을 대신하고 이해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집안에 함께 사는 사람도. 동료도. 소위 학회 이사장이라는 사람도 모두 마찬가지다.
공식 행사에서 내가 속한 학회 이사장이라는 분을 만났다. 그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이 일을 처음 시작하는 10년 전 즈음이다. 나보다 연배가 7-8년 위 즈음 되는 선생님이 정치적 행보를 거듭하다 학회 얼굴마담 이사장을 하신다. 나는 정확히 학회 이사장이 어느 역할을 하고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여기저기 언론 인터뷰, 공청회 등에서 이름을 자주 본다. 개인적 인연의 시작은 서로 간에 환자 치료, 수술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관계가 되었다. 잠시 사담을 나누며 신세한탄, 얼마 전 수술한 환자 이야기를 하였다. 한번씩 웃기만 할 뿐, 뭐라도 공감하거나 대책을 전혀 말하지 않으신다. 힘들면 그냥 안 하면 된다고, 배 째라 하면 된다고 한다. 소아과처럼 배 째고 문 닫으면 된다고 한다. 정말이다. 이곳 학회 이사장이라는 소위 집행부, 지도층에서 하는 말이다.
더 이상 말문이 막히고. 그분을 핸드폰 저장목록에서 쓱 지워야 할지를 고민한다.
역시나 사람은 혼자 사는 동물인 것이다.
동료, 가족, 그리고 어느 집단에 소속된 누구든지 마찬가지다.
잊을 듯하면 안타까운 희생자가 뉴스에 나온다. 그나마 뉴스에 나와야지 마지막 배웅길에 애도와 진심으로 슬퍼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안타까운 희생자가 나왔다. 한 생명 사라진다는 것은 수많은 이유로부터 나온다. 스스로 판단에 의해서, 혹은 타인에 의해 목숨이 사라지기도 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저 쓸쓸히 떠나버리곤 한다. 나 또한 그런 쓸쓸하고 너무나 슬픈 사람들, 그 가족들을 많이 봤다. 남는 사람들만 더 슬프고 괴롭다. 전혀 신경 안 쓰고 자기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사람들은 너무나 잘 살고 있다. 그것이 인생인 것을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오늘도 피곤하고 내일도 피곤하다. 물론 어제도 피곤했다. 다만 다른 점은 어느 날은 죽을 듯이 내 목숨이 하루 줄어들 만큼 피곤하였다는 것이고 또 다른 날은 적당히 견딜만한 큼 피곤한 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