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압 떨어지는 모니터 알람에 나의 목소리도 함께 커진다. 다급한 나의 목소리에 간호사가 서둘러 칼, 메스를 건네준다. 손에 메스를 꽉 쥐고 마음속으로 심호흡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마취과선생님 들을 수 있게 말한다.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배를 열겠습니다.'
배는 지퍼가 달린 것도 아니기에 쉽게 열고 닫고 할 수 없다. 피부부터 한층 한층 메스와 전기소작기를 통해 가장 안쪽 복막까지 개복해야 한다. 이 환자는 층을 구별하여 열 수 있는 틈이 없다. 이미 배 안에 가득 찬 피로 인해서 복부 압력이 증가되어 배가 팽팽한 상태이다. 마치 풍선이 빵빵하게 차 있는 것 같은 상태이다. 메스로 환자 정중앙 피부를 절개하고 피하층, 근육, 근막을 차례로 여는 순간 배 안에 피가 솟구쳐 나오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걷잡을 수 없고 지체할 수 없다. 피와 복벽 층들이 범벅되어 전기소작기도 소용없다. 가위를 가지고 나머지 배를 열어젖힌다. 피를 흡인할 수 있는 석션 기구를 통해 배속 피를 뽑아내고 손과 다량의 거즈가 함께 환자 배 안으로 들어간다. 이 환자는 이미 CT를 통해 피가 나는 부위를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상태이기에 그 부위로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들어간다. 피를 한가득 걷어내고 이제 조금 시야가 나온다. 피가 뿜어 나는 곳이 보인다. 상당한 동맥압으로 뿜어 나오는 혈관을 잡아야 한다. 잠시 한숨 돌리며 그 부위를 내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다. 다시 한번 침착이라는 단어를 머리에 써보고 저 혈관을 어떻게든 안전하고 최소한으로 잡아야 한다. 자칫 혈관의 근위부, 환자에게 가까운 큰 혈관 부위를 잡아버리면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큰 혈관을 결찰, 묶어버릴 경우 장기의 많은 부분이 괴사 되거나 기능이 줄어들 것이 문제이다.
배 안에 2리터 가까이 고이게 한 피를 나게 한 주범이 바로 저 혈관이다. 교통사고로 배 한가운데에 큰 충격을 받아 장기가 찢어지고 저 혈관이 터져버린 것이다. 다행인 것은 약간 말초 쪽 얇은 혈관이기에 잘 결찰이 가능하고 그 부위 장기에 큰 이상이 없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혈관을 잡았다고 수술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추가로 손상된 부위, 출혈 부위가 있는지 배 안을 잘 살펴야 하고 묶은 혈관, 찢어진 조직 주위 부위를 잘 봉합해서 정상 기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이미 내 발과 다리 아래 수술복은 뜨끈한 액체가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 한순간도 발을 움찔하지 않고 오로지 나의 시선과 손, 그리고 환자 배 안을 집중하였다. 끈적한 액체가 피라는 사실을 안 것은 이제 환자 혈압이 안정되고 마취과 선생님께서 이제 혈압 상승제를 멈추겠다고 말한 순간이었다.
2.
보호자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묻는다.
'그런데 꼭 수술해야 하나요? 왜 전신마취하고 배를 개복하나요?
이미 수차례 말해도 내 말을 이해 못 한다. 차라리 어제 수술한 배가 불러오고 혈압이 뚝뚝 떨어지는 상황이라면 마음 편하게 서둘러 말하고 보호자도 선 듯 이해하고 동의한다. 그러나 모든 환자가 교과서에 나오는 기준처럼 딱 떨어지는 상황으로 수술적 치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환자는 사고 경위, 그리고 환자 통증, 그리고 내가 환자 배에 손으로 지그시 눌렀을 경우 압통과 반발통을 호소하는 것이 복강 내 장기 손상이 강력히 의심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 바로 방금 찍은 CT 검사 상에서 확실하게 장천공, 내부 장기 손상 의심 소견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경우가 가장 난처하다. 복강 내 장기, 특히 소장, 대장 천공인 경우 유리공기라고 장 안에 있는 공기가 외부 복강 내로 나와 보여야 한다. 이런 소견이라면 누구라도 100% 자신있게 복부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반드시 빠른 시간 내로 해야 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통증, 압통과 반발통 그리고 사고 기전 등 만으로 수술 결정을 하기는 참 애매한 상황이다. 물론 아주 오래전 CT 검사가 없는 시절에는 이런 소견만으로 우리 선배 외과의사들은 수술 결정을 하고 환자를 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일반인들도 쉽게 검사라는 틀에 박힌 판단 기준에 사로잡혀 의사 판단보다 검사를 더 믿는 경향이 있다.
이 환자, 환자 보호자 경우도 마찬가지다. 검사 결과가 무엇이냐 먼저 묻는다. 물론 바로 뒤에 있는 환자는 보호자가 이렇게 따지듯이 나에게 말하는 중간에도 배를 부여잡고 아프다고 말한다. 이럴 때는 솔직히 모든 상황을 환자, 보호자에게 설명하고 함께 최선의 치료 방향으로 찾아가야 한다.
보호자는 나의 설명을 듣고 다시 되묻는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 배안 장기가 터졌나요? 확실히 터졌다고 장담하시나요? 배 안에서 지금 피가 많이 나고 있나요?
지금 꼭 수술해야 하나요? 연세도 많고 노인이신데 마취, 수술이 가능할까요?'
의심을 품은 질문, 더해서 나이 드신 어머니 걱정에 다시 질문한다.
모니터에 방금 찍은 환자 CT 사진을 보며 보호자에게 다시 말한다. 복강 내 장기들을 보여주며 장기 손상이 의심되는 부위, 복강 내 보이지 말아야 할 액체가 고여있는 사진을 보며 한 번 더 설명한다.
"지금 수술 결정을 하고 수술을 해야 합니다.
CT 검사, 제가 진찰한 소견 등 모든 것이 100% 장천공을 확신하는 소견은 아닙니다.
의학에 100%라는 것은 없습니다.
특히 지금과 같이 응급상황에서는 100%를 찾아가다가 자칫 환자 상태가 급격히 악화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잠시 생각한 후
"제 가족이라면 지금 이 순간 바로 수술 결정을 하고 수술받겠습니다"
이 마지막 말에 보호자는 더 이상 질문과 의문 없이 수술 동의서에 싸인하였다.
3.
환자 배에 손을 얹어놓고 다시 지그시 눌러본다. 그리고 다시 환자 얼굴을 쳐다본다. 내 손안에 투시 카메라가 달려 환자 배 안을 뚫어서 내다볼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고 잠시 상상을 해본다. 그러나 그런 초능력을 과욕이다. 내 능력은 투시 안경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지금 내 앞에 있는 환자가 최선의 치료 방법을 찾게 도와주는 것이다. 때로는 뱃속을 검사하는 CT도 뼈가 똑 부러지는 골절처럼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뱃속 문제는 수많은 장기들과 혈관이 들어있는 곳이기에 진단도 어렵지만 치료도 쉽게 결정하기가 어렵다.
환자 상태, 어떻게 다치고 수상한 기전이 되는지, 나와 처음 만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통증이 변하는 정도가 어떻게 되는지도 함께 고려한다. 내 손을 환자 배 위에 눌러서 아픈 압통과 떼면서 느껴지는 반발통도 함께 살펴본다. 복강 내 심한 염증 등이 있을 경우 발생하는 복부 강직도 내 손으로 함께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혈액검사, CT 소견도 앞서 본 것과 함께 고려한다. 이렇게도 배를 열겠다는 수술 결정이 어려울 경우 다시 환자 옆으로 다가가서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을 다 리뷰해 본다.
머릿속으로 환자 배 안을 다시 상상해 보며 외상외과의사는 결정하였다. 이 환자 배를 열기로, 수술하기로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