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동 계단 집 2.

이유 없이 잡혀와 익사한 개미와 송충이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by Auntie J

시계를 힐끔거린다.

30분이 훌쩍 지나갔다.

같은 모양 과일을 손가락으로 연결해 지우는 게임을 딸에게 배운 뒤, 막간이 생기면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고 과일을 신나게 없앤다. 그런데 아직 핸드폰 게임이 인간에게 베푸는 은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인가, 손가락을 사방팔방 움직이고 나면 어김없이 죄책감이 든다. 시간을 의미 없이 사용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다.


의미 없는 시간이 어디 있겠나.

지나고 나면 어떤 의미라도 결국은 새겨지기 마련인걸.


그렇게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이 상도동 계단 집 시절엔 참 많았다.

지금처럼 장난감이 흔했던 시절도 아니고, 무엇보다 컴퓨터라는 단어조차 익숙하지 않던 때가 그때 아니던가.

시간도 공간도 한갓지고 여유롭던 시절. 학교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내 마음대로 시간을 채울 수 있었던 유일한 시절이 그때였지 싶다.

절대 질리지 않을 다양한 놀이를 생각하면 숙제쯤이야 거침없이 해치울 수 있었고, 조용할 날이 없을 만큼 싸웠던 오빠와도 놀이 멤버가 되기 위해선 굳은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방과 후, 우리 남매들은 아니 그 시절 우리 또래 대부분은 굳이 돈을 내고 운동을 하러 다니지도 않았고, 악기를 배우느라 분투하지 않아도 됐었다. 오직 상도동 계단 집 바로 그 현장의 지형과 지물을 120프로 활용해 잠자리에 드는 그 시간까지 싸우지 않고 조용히 놀기만 하면 하루를 잘 보낸 명예롭고도 착한 어린이가 될 수 있었으니까.

지형지물을 이용한 으뜸 놀이는 송충이와 개미를 이용한 상황극 연출이었다.

덧붙이자면 누가 어떤 역할을 맡을지 아무도 모르고 당연히 각본도 없었지만 일단 시작되면 어느 누구도 당황하는 법이 없는 즉석 연극 정도 되겠다. 봄이 무르익어 여름으로 넘어갈 즈음, 나무 곳곳에는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송충이가 천지였고, 적당한 나뭇가지로 젓가락질해 잡는 것은 징그러운 축에도 못 끼는 일이었다. 그나마 송충이쯤 되니 젓가락으로 잡았지 개미는 당연히 손으로 잡아야 하는 부류였다. 이렇게 등장 멤버가 모이기 전, 마당 수돗가에 항상 대기 중인 빨간 대야에 우선 물을 절반쯤 받아 채운다. 다음은 나뭇가지와 나뭇잎, 돌, 흙, 고무호스 등등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을 이용해 캐릭터들의 생활 터전을 만든다. 지지리도 운이 없어 잡힌 송충이와 개미는 나뭇잎 배도 타야 하고 나뭇가지 다리도 건너면서 엄마, 아빠는 물론이요, 선생님에 경찰 아저씨 등 오만가지 배역을 넘나들며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이렇게 온갖 사연을 만들어 떠들다 보면 해는 뉘엿해져 사방은 어둑해지고 물에 손 발을 담그며 놀았으니 몸은 자연스레 으슬으슬해지기 마련. 적당히 밥때를 맞춰 들어가기만 하면 오늘의 할 일 끝.


조금 더 창의적인 놀이로는 담벼락에 물 그림 그리기가 있었다.

해가 짱짱한 오후, 마당 수도의 고무호스를 질질 끌고 널찍한 시멘트 담벼락 앞에 선다.

고무호스가 색연필이고 담벼락이 스케치북 정도 되는 거다. 물론 물 아까운 줄 모르고 쓴다고 엄마에게 된통 혼이 난 뒤로는 어디에서 주워 왔는지 가짜 주사기, 스포이트, 그리고 운이 좋았던 한 때는 물총이나 분무기도 사용했던 것 같다. 분명 사람 얼굴을 그렸는데 눈, 코쯤을 그릴 때면 시멘트 벽에 물이 스며들며 얼굴이 일그러지고 뭉개져 전혀 다른 의도의 흔적이 남게 된다. 이쯤 되면 뭘 그린 들, 어떤 제목이든 소화해 낼 수 있는 수많은 작품이 만들어진다. 물을 뿜어 시멘트 벽을 적시다 보면 신기하게도 물이 순식간에 마르는 순간이 있다. 특히 햇빛이 유난한 날이면 코를 그리기도 전에 얼굴이 없어지기도 하고, 희미한 윤곽만 남아 급하게 작품 이름을 바꿔야 하는 일도 생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술 감각이라고는 희박했던 손 위 오빠는 당시에도 담벼락에 해골바가지만 진창 그리면서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부류의 노래를 지겹게도 불렀던 것 같다.


그렇게 밖에서 놀기 좋은 계절이 지나고 뜨끈한 아랫목에서 배를 깔고 종일을 보내기 딱 좋은 겨울이 온다.

눈도 많고 유난히도 추웠던 그 시절 겨울이면 한창 크는 자식들 셋이 넓지도 않은 방에 종종종 모여 다글 거리며 치고받기가 예사였다. 도를 넘어선 난리 법석이 벌어질 즈음이면 밖으로 나가 놀아라 쫒아 버리기라도 하셨을 법한데, 다행히 우리 엄마는 애들 번잡한 것만큼은 어지간히 견뎌내는 분이셨던 것 같다.

그렇게 나란히 배를 깔고 반나절은 족히 보냈던 놀이가 바로 귤껍질로 살림을 하는 소꿉놀이였다.

두 살 아래 여동생과 까만 손잡이 도루코 연필깎이 칼을 하나씩 쥐고 먹고 남은 귤껍질을 네모로 세모로 잘라 접시를 만들고 과육에 붙어 있던 흰 부분을 쌓아 올린 뒤 도려낸 귤 꼭지를 마지막에 얹어주며 멋까지 부려준다. 분명 처음은 엄마에 아빠, 혹은 1인 2역까지도 불사하는 열정으로 역할에 충실하다가 어느 이후부터는 역할이고 뭐고 제쳐버리고 오직 귤껍질로 무언가를 만드는데 몰두하게 되는데, 채치고, 다져서 제멋대로 붙인 이름의 요리에, 온갖 도형을 거쳐 귤껍질 생필품까지 나올 즈음이면 손가락은 온통 귤껍질처럼 노란색으로 변해 있었다.

한 번은 호기심에 두루마기 휴지를 풀어 불장난을 했다가 엄마에게 세상 욕을 다 얻어먹기도 했고, 길고도 긴 계단 꼭대기에서 6백만 불의 사나이와 소머즈 놀이를 하며 뛰어내리다가 한참을 굴러본 기억도 있다. 지금이야 비 내리고 눈 오면 길 막히고 사고 날까 겁부터 먹지만 그땐 비가 와도 아주 많이 쏟아지는 순간을 오히려 즐겨 계단 집 꼭대기 계단부터 콸콸 흘러내리는 물에 발을 척 걸쳐 발 폭포를 만들면서 킥킥거리기가 일쑤였다.

물론 술래잡기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땅따먹기는 기본 중의 기본 놀이였다.


그림 from pixabay


돈을 벌면서부터다.

일을 해야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먹고살 수 있다는 빌어먹을 이치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리자 나는 기가 막히게 일에 집중했다. 집중이 과해 집착으로 가는 과정을 알아차렸음에도 천성적으로 타고난 불안 때문인가, 과하게 일을 해왔다. 일에 집중하려니 다른 것들을 위한 시간 배분에 박해지기 시작했고, 일 이외의 다른 여타의 행위는 생활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들로 평가절하 시켜 버렸다.

그리 살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시간이라도 생기면 물론 그런 시간이 흔할 수 없게 몰아치며 살았지만, 혹이라도 생기면 왠지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소심한 반성 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버릇처럼 핸드폰을 만지작 거려봤자 기계에 익숙하지 않으니 고작 과일이나 지우는 게임을 다시 시작한다.

이쯤 했으면 지우는 순서도 외울 법 한데 난 열 번을 해야 겨우 한번 이기는 수준이다.

배알이 뒤틀려 안 하고 말지, 웬만하면 이기게 해 주지,. 이러니 기계 하고는 노는 게 아닌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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