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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ntie J Dec 11. 2018

엄마 집, 엄마방에서 이틀 밤

: 언제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닥칠 그 일들.

“여기 검은 비닐봉지에 있는 거. 이건 또 뭐예요?”

“둬라. 다 먹을 거다!”

“아니, 이게 언제 건 데 아직까지 있냐고요. 그냥 버려요!”

“내 살림이지 니 살림이가? 그냥 두고 좀 앉아라!”

누군 앉아서 귤이나 까먹고 수다나 떨면서 빈둥대고 싶지 않을까, 미쳤다고 오랜만에 친정까지 왔는데 청소나 하고 싶겠냔 말이다.

냉동실, 냉장실 한참을 털어 쓰레기 더미를 만들고 나니 광처럼 다용도 실처럼 쓰는 부엌 옆 방이 다음 차례라며 기다리고 있다.

‘아니, 두 식구 살림에 이렇게 재워 놓으시면 어떡한데. 유통기한 다 지나요!’

소리 질러 봤자 분위기만 험악 해질 거고, 말아야지 하면서 오를 대로 오른 열을 꾹꾹 눌러보지만, 입은 따로 논다. 투덜거리지라도 않으면 화병 제대로 얻을 판이다. 냉장고에 광뿐이면 다행이지, 화장실은 화장실대로 마트에 들를 때마다 하나 둘 업어온 세제들로 그득하고, 현관 입구엔 언제 적 고구마인지 박스로 들어와 있다. 다 먹지도 못할 거, 쓰지도 못할 거, 쌓아만 두다가 쓰레기 될 거 왜 이러시냐 엄마에게 묻는다면 당신의 대답은 한결같이 간결하고 명확하다.

“먹는 거야 사위들, 손주들 오면 다 먹을 거고, 공산품은 썩지도 않는데 어떠나? 하나씩 더 줄 때, 집어 오는 게 아끼는 거지! 니도 하나 가져가라~.”

 

알뜰하게, 깔끔하게 그게 안되나. 두 노인만 사는 건데 뭐가 그리 살림이 많고 어수선할까. 물론 나 아닌 다른 사람 살림살이를 두고 이러 쿵 저러 쿵 하는 건, 참으로 예의에 어긋난다는 걸 나도 모르는 바 아니다. 집집마다 사람마다 사는 게 다른 법인데, 내 잣대를 들이대며 왜 이렇게 사느냐 마느냐 그게 더 아닌 거지, 엄마는 엄마 사는 법이 있는 거고, 나는 내 법이 있고.

그런데,. …… 아무리 인정하고 넘어가려 해도 친정 도착 딱 1분 전까지, 그것도 머릿속에서만 가능하다. 정돈 안된 마당에 현관 주변, 대충 싸서 박스 속에 박혀있는 양파에 감자 봉지, 대파라도 빠꼼하게 보이면 평생 사라질 것 같지 않은 예민함과 투덜이 올라와 엄한 아버지한테 날아간다. “아버지는 마당이라도 좀 쓰시지. 평생을 손 하나 깜짝 안 하시네.”


제재소를 하는 외가에서 큰 살림만 보고 자란 엄마는 남편의 고만고만한 월급봉투로 애 셋을 키우면서도 항상 손이 큰 주부로 사는데 거침이 없으셨다. 김장에, 고추장 된장은 남 퍼줄 요량으로 독이 넘치게 담그셨고, 온갖 친인척 잔치는 기본이요, 일 년에 열두 번도 모자라 열네 번 제사상을 차리는 것까지 손 클 일 천지였는데, (큰엄마는 재일교포에 캐나다에 거주하셨으니 조상님들께서 제사상을 받으러 바다를 건너실 수는 없고, 그러니 죄다 엄마 몫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원래 손이 컸던 건지, 이렇게 살다 보니 손이 커진 건지, 원래도 큰데 손 클 일만 하고 살아 더 커진 건지, 좌우지간 뭐든 많이 사고, 나눠주고, 또 사고. 이게 주특기였다. 이런 엄마의 주 특기가 단점이자 약점으로 바뀐 건 아버지가 탄탄한 직장에서 일하셨음에도 사기로 한번 ‘휘청’, 보증으로 또 한 번 ‘휘청’하는 바람이었다.


그럼에도 결국은 ‘겨우’라지만 집 한 채라도 장만하셨고, 자식들은 모두 출가시키셨으니 이젠 넘치든 모자라든, 손이 크든 작든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싶지만 문제는 엄마의 허리와 다리.

엄마는 마흔 겨우 지나서부터 디스크로 고생을 시작하셨는데 이게 좌골 신경통으로 도지면서 예순 되기 전부터 온갖 통증에 시달리셔야 했다.

덕분에 밤만 되면 자식 중 누군가 한 명은 엄마 다리를 주무르거나 밟으며 꾸벅꾸벅 졸음과 사투를 했고.

평생을 그렇게 아프셨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온갖 일을 도맡아 해치우셨으니 허리고 다리고 버텨낼 수가 있었겠나. 여태 본인 몸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미련하게 새끼들 해 먹이고 챙겼던 걸, 당신 한 사람 힘들다고 안 할 수 있나 하시며 철마다 누구도 바라지 않는 먹거리를 쟁이느라, 다리를 질질 끌면서 일을 벌이고 계시니 울분이 넘치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겠나 말이다.


엄마는 날씨에, 컨디션에, 노동량에, 백 가지 이유로 천 가지 통증을 느꼈고, 서서히 다리에 기형이 오고 허리가 굽으면서, 슬쩍슬쩍 절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흔을 넘기자 다리 말고도 이곳저곳이 고장 나 크고 작은 수술을 받아야 했고, 드디어 그 끝에 다리고 허리고 잦은 마비까지 오기 시작했다. 수년 동안 복용한 마약성 진통제는 더 이상 효과가 없었고, 심한 통증은 불면을 끌어들여 안 그래도 심약해진 노인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결국 그 유명하다는 대학병원 추천으로 76세의 나이에 허리 수술을 고집하시는데, 노년에 허리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낫다는 모두의 조언은 당장 내일 죽어도 좋으니 수술이라도 받고 죽겠다는 엄마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수술은 잘 됐다’는 병원의 의례적인 보고와 달리 엄마는 그 날로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시고 자리를 보전하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반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겨우 친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들 마음 쓰고 애 태우느라 고생하고 있는 형제들한테 미안해서라도 태평양을 건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제대로 미안해해야 덜 속상할 것 같았다.


“왔나!!! 괜찮다니까 뭐 하러 그 멀리서 오나?”

힘이 없는 건지, 망가진 모습을 자식에게 보여 주자니 속이 상한 건지 엄마 목소리가 심하게 가늘다. 다리가 움직이질 않으니 엉덩이로 몸을 겨우 끌어 조금이라도 현관문 쪽으로 움직이려 하지만 마음처럼 몸이 앞으로 나가질 앉는다. 엄마 몸이 기우뚱거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저러다 엎어지겠다.


겨우 참았다. 눈이 빠지는 것처럼 뜨겁고 욱신욱신 얼굴이 제멋대로 뒤틀릴 정도로 감정이 격해졌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엄마를 차마 끌어안지도 못했다. 없던 살이 더 빠진 엄마는 거의 해골에 가까운 모습이었고 내가 끌어안는 순간 바스러져 버릴 것 같아서. 엄마한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건지 망연하다가, 이놈의 병원을 그냥,. 싶다가, 다들 수술하지 말라고 할 때 말 좀 들으시지 이게 뭐냐.. 싶다가, 이제 어쩌나, 이렇게 영영 다리를 못 쓰게 되시면 어쩌나 말로만 듣던 걱정이 눈앞에 덮쳐왔다. 그리고 너무나 명확하고도 확실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푹 꺼지게 했다. 올 것이 오고 있는 거였다. 이렇게 갑자기, 한 순간에.


엄마 옆에 이불을 깔았다.

벌써부터 각방을 쓰고 계신 아버지는 엄마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인데도 각방 유지의 법칙을 기가 막히게 잘 지키고 계셨다. 환자용 이동 변기를 구해 오신 걸로 당신 할 일의 절반은 끝난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또 얼굴 근육이 나대면서 목청이 확 트이려는 찰나, 그래, 영감도 팔순이 넘으셨다. 아파서 저러고 있는 사람이나 영감이나 다 늙고 힘든 노인네다. 노인한테 노인을 돌보라니 가혹하지. 이건 젊은 내가 감당할 바지. 답답하던, 미치겠던, 힘들어 죽겠던 이건 젊은 것들이 감당할 바가 맞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침대에선 못 자고, 바닥에 요를 깔아라, 엄마 자리 베개 주변으로 물 컵, 새벽에 먹을 약, 스탠드를 쭉 둘러놔라... 상황 따라 살아진다더니 어느새 나름 맞춰 살고 계시는구나. 순간순간 속이 문드러진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 밤, 엄마와 나는 별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시차 때문이었는지, 유난히 밝게 느껴진 스탠드 불빛 때문이었는지 어슴푸레 깨어 보니 엄마는 이동 변기를 향해 몸을 움직이고 계셨다. 나름 몇 개월간 가장 덜 수고롭게 방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동선과 방법을 터득했다는데, 먼저 큰 수건을 다리 아래로 넣고 침대 다리를 붙잡는다. 침대 다리를 지지대 삼아 꼭 붙잡고 조금씩 건너 건너면서 엉덩이를 민다. 방문 근처로 움직여 미리 열어둔 방문을 살짝 제치면 절반은 왔다. 문제는 문지방이었는데 순간 힘을 확 주면서 엉덩이를 문지방에 걸치고 다시 미끄러져 내려온다. 오밤중에 아무의 도움도 없이 고난의 코스를 홀로 극복하시느니 좌변기를 아예 방안에 놓자 하니 도저히 냄새 때문에 그건 안 되겠다 하신다.

일을 보고 다시 방으로 들어오는데 또 한참. 그렇게 제대로 용을 쓰며 방으로 들어오셨으니 있던 잠도 사라질 판 아닌가. 거기에 잠들기 전 모녀지간 두런두런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가 왜 없으셨을까, 한참을 뭐라 하시는데 내 정신은 이미 깜깜이다. 귀 너머로 한 마디 두 마디 오락가락하는가 싶더니 아마도 나만 잠든 모양.


얼마나 더 잤을까.

이번엔 방문 너머로 뭔가 툭툭 치는 소리 때문에 일어나야 했다. 허벅지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간간이 짜증 섞인 신음 소리. 너무나 익숙한 소리다. 다리에 힘은 들어가지 않는데 통증은 여전하다니 정말 빌어먹을 경우다.

사람이 아파서 혼자 잠을 못 자고 있는데 어찌 옆에서 나만 멀쩡할 수가 있겠나. 그것도 오랫동안 못 본 딸 아닌가. 비몽사몽 마루로 나가니 역시 다리 통증 때문에 도저히 잘 수 없다는 엄마. 그렇게 삼 십분. 수술 때문에 눌린 신경이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리는 거란다. 힘들어도 어떡하냐 기다려봐야지, 환자용 보행기를 잡고 걷는 연습을 하셔야 한다 등등 모두 다 아는 쓸 데 없고, 의미 없는 말만 한 바가지 하다가 다시 자기로 했다.

엄마가 들어오시기 편하게 방문을 잡고, 수건을 끌어도 보고, 헝클어진 이부자리도 다시 펴고 뭐라도 하는 척 하던 나는 다시 바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엄마는 한번 더 잠에서 깨 힘들어했는데, 나는 그야말로 의무로, 의리로, 양심 때문에 일어나는 척이라도 하기 위해 몸을 세웠지만 세 번째 정도 되자, 엄마가 아픈 건지 내가 아픈 건지 정신이 몽롱하고 피곤만 쏟아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한 아침이 왔다.

밤마다 이렇게 전투를 치러야 한단다.

엄마는 9시가 다되도록 일어나질 못하셨고, 나는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끌고 아침밥을 차릴 준비를 했다. 나도 그냥 더 자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의무로, 의리로, 양심 때문에 도저히 더 잘 수가 없었다. 종일 청소를 하고 장을 보고, 뭐라도 드실 거리를 준비하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이틀째 밤. 역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아예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역시 볼 일 보느라, 약 드시느라, 빌어먹을 통증 때문에 엄마는 세 번, 네 번 시간마다 번번이 잠에서 깼다. 그래도 두 번째 밤이라 좀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난 첫날보다 더 힘들었고 더 피곤했고 심지어 귀찮음인지 짜증인지 육체에 지배당한 보잘것없는 정신이 보내는 신호에 완전히 굴복당했다.

‘아… 엄마 아파서 어떡해..’ 슬쩍 한마디 던지고 피릭 고꾸라진다.

‘아이고, 또 일어나셨네, 나가시려고..’ 또 피리릭.

의무도, 의리도, 양심도 다 던져버리고 오직 본능에 충실히, 그냥 자고 싶었다. 푹.

하지만 한마디라도 해야지, 모른 척 쿨쿨 잘 수는 없지 않나, 딱 그 정도의 의지만 살아 있었던 건가.

첫날처럼 엄마를 따라 마루로 나가지도, 엄마가 통증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게 뻔한 말을 건네지도 못했다.

잠꼬대하듯 몇 마디 던지고 내 갈 길 잘…. 간 거다. 푹.


다음 날, 더 멀쩡한 아침, 역시 나만 아침이고 모두 한 밤중인 친정 집 마루에서 밤새 까먹었던 엄마 상황을 더듬고 있는 내 상황을 쳐다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자식이래 봐야 다 소용없지, 당장 부모가 아파 죽는다는데도 겨우 졸린걸, 그걸 못 참고 떡이 돼 잤으니..’

자책감에 두 번째 날은 집안 대청소를 시작했다.

태평양을 건너와서 엄마 아버지를 위해 한다는 일이 겨우 대청소였던 거다.

다른 사람 손을 빌려 식사, 청소, 빨래 다 해왔다지만 그래도 집안 속속들이 들춰보고 정돈하지 않은지가 반년. 이럴 때 바로 딸이 제 임무를 해 내야지. 냉장고에 찬장에, 광에 닥치는 대로 다 뒤지고 엎는데,

아…. 예전 같지가 않다. 말린 나물에, 콩이며 팥도 예전처럼 수북하지 않고, 어수선하게 널린 물건들도 대책 없이 많지가 않다. 괜히 들쑤셔 먼지만 풀썩 이게 했나. …


이미 엄만 평생을 해야 할 바라 믿고 살았던 일을 서서히 그만두고 있었던 거다.

아니,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거지. 하고 싶어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때가 온 걸 아셨으니.


엄마가 눈에 띄게 절기 시작하자 자식들은 지팡이를 짚으시라 권했다. 하지만 엄만 자존심이 상해서 도저히 지팡이를 짚을 순 없다 하셨다. 그러나 곧 지팡이 없인 대중교통을 이용하실 수도 가까운 가게에 콩나물 한 봉지 사러 가는 것도 힘들어지자 자연스레 지팡이를 옆에 두셨다. 자리를 보전하고 크고 작은 일을 보기가 힘들어 기저귀를 차실 때도 한사코 그 정도는 아니라고 거부하시다 결국은 한 달도 넘게 기저귀를 차셨다고 한다.

그렇게 조금씩 맘이랑 다른 몸을 받아들이신 지 1년이 다 돼간다.


난, 도무지 자신이 없다. 엄마처럼 몸이 하나 둘 내 말을 듣지 않고, 내 맘대로 내 살림살이를 감당하지 못할

날이 언젠가 올 거다. 아니, 세상사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든가. 곧 올 수도 있다.

그런데 마주할 자신이, 나는 없다. 아니, 자신이 있든 없든, 준비가 됐든 말든 아무 소용이 없을 거란 걸 알기

때문에 두렵다. 결국 엄마도 나도 생전,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을 겪으러 달려가는 중이고 결국은

끝이 날테니.. 누구도 대신 겪어주지 못하고 오직 내가 겪고 내가 마무리 짓고 떠나야 할 일이다.

그래서 무섭고, 그래서 엄마를 보고 있자니 두렵다.

아픈 엄마를 두고 앉아 떠오른다는 걱정이 이 모양이니 엄마 눈을 마주할 염치가 없다.

그런데도 언제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닥칠 일, 그 두려움이 깊어져 도무지 얼굴이 펴지질 않는다. 

 

음식은 먹을 만큼만 하시고 안 쓰는 건 좀 버리고 사소! 소리 지르면 너나 깔끔하게 잘 살아라. 난 이렇게 살아도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더 큰 소리로 내 입을 막아 버리던 엄마, 억척같이 김장 배추를 헹구고, 메주콩을 삶던 엄마를 다시 보고 싶다.


봄이 오면 노인용 전동차라도 하나 마련해 동네 주변 산책이라도 다니시게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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