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서 명동까지
“이제 그만 보려고요.”
“......... 그만 만나자는 말씀인 거죠?”
“....... 네.......”
“............. 저..... 혹시 저를 다시 볼 거란 생각 안 들어요?”
“네??.................. 아직 그런 생각까진 안 해 봤는데요.”
“.................. 다시 볼 것 같아서요.”
“.......................”
“다시 보면 어떡하실 거예요?”
“.......................”
“다시 보면 오늘 일 후회하실 텐데요?”
“.......... 아.... 네..”
그만 만나자는 남자에게 다시 볼 것 같다는 예언이라니. 그쪽이 먼저 헤어지자 했으나 언젠가 다시 나를 찾을
날이 올 테니 두고 보자 그런 뜻인가?
그날 만남의 목적은 일방적인 상대편의 향후 보이콧 선언으로 이미 달성 불가.
아무리 무뎌도 이 부분에선 박차고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
“그럼 먼저 일어날게요.”
원래 좀 크다 싶은 충격은 바로 느껴지지 않는다 했던가.
태생이 무딘 내 친구 Y는 바로 전 상황이 만나던 남자에게 차인 거란 걸 살을 파고드는 한겨울 밤바람이 온몸을 휘감고야 알아차렸다.
1996년 12월 26일.
하필 기억하기 딱 좋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 그것도 눈이 내려도 너무 내린 화이트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었다.
유난히 종로 주변을 좋아하던 Y는 누구를 만나든 항상 종로서적 앞에서 약속을 시작했다.
거기서 종로 3가 쪽으로 내려가다 길을 건너면 맞은편 골목으로 인사동이 시작된다.
인사동으로 들어가는 초입, 금강제화 옆 건물서 너 개를 지나면 골목 안에 Y가 늘 들르던 카페가 있었다.
가파른 2층 계단을 내려온 Y는 하필이면 좀 더 오래 보고 싶었던 사람에게 거절당한 민망함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 연애사업에 갑자기 울컥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울어선 안 될 것 같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어디로 가야 할까 잠깐 주춤.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 잠깐 순간에도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 코끝이 쨍하고 얼얼해졌다. 그래도 잠시 걷고 싶었다.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려도, 눈이 펄펄 내려도
걷는 게 나을 듯했단다.
Y의 걸음은 자연스레 길을 건너 명동 쪽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치킨 집을 지나 학원이 모여 있는 종로 3가를 왼쪽으로 두고 무작정 걸어 올라갔다.
양껏 내린 눈에 길은 군데군데 얼어붙어 걷기가 쉽지 않았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가락에 힘을 잔뜩 주며
걷자니 대체 이런 날씨에 왜 굽 높은 구두까지 신고 나왔는지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졌다.
겨울바람에 얼굴은 이미 감각을 잃을 정도로 땡땡해졌고 도로 옆 쌓인 눈의 냉기가 구두 안으로 그대로
들어오는 건지 발가락도 얼어붙었다. 하지만 다른 카페에 들어가 앉고 싶지도 않았고 무작정 택시라도
잡아타고 집으로 들어가는 건 더 싫었다.
늘 그랬듯이 잠시 걸으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하필 추워도 너무 추웠다.
그렇게 15분 즈음 걷자 명동성당으로 올라가는 비스듬한 고갯길이 나왔다.
‘왜 어긋나는 걸까. 왜 내가 더 좋아하는 걸까. 도대체 왜 헤어지자는 건지 물어나 볼걸.’
명동성당을 지나 쭉 뻗은 명동 길을 내려왔다.
늘 정신없이 북적이고 바빠 보이는 명동이 조용했다.
시간은 이미 밤 9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고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 이 정도 추위면 사람이 없을 법도 했다.
다행이었다. 이 추운 날씨에 보란 듯 팔짱이라도 끼고 딱 붙어 길을 지나다니는 연인들을 안 볼 수 있어서.
하지만 옷 속으로 파고드는 냉기는 헤어진 Y의 처지를 더 춥게 만드는 것 같았다.
명동에서 을지로 쪽으로 쭉 걸었다. 롯데 백화점 부근 버스 정류장 쪽으로 나가는 지하차도를 건너 롯데 백화점 앞에서 좌석버스를 기다린다. 가만히 서 있자니 온 몸의 감각이 멈춘 것 같아 얼어붙은 발가락을 움직여 본다. 하지만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이렇게 모든 게 멈춘 것 같은데 내일이면 다시 아무렇지 않게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밥을 먹고, 그렇게 일상을 살아야겠지. 잠시 잠깐 아프고 지나가는 거라면 좋겠지만 마음이 풀리려면 시간이 걸릴 테고.
그런데 이번엔 좀 오래 걸릴 것 같아 Y는 다시 또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니 그제야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구를 탓하고 욕할 수 있으면 아예 낫겠는데 마음이 닿질 않아 안 되는 일이니 어쩌겠나..
10개월 뒤, 다시 인사동, 그 카페에서 Y는 그만 만나자던 남자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다.
춥고 추웠던 헤어짐 이후 그들은 2번을 다시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했단다.
Y는 그 남자와 헤어질 때마다 종각에서 명동까지 눈물방울을 달고 걸었다.
마치 어제 이런 기분으로 이 길을 걸었던가, 그제 걸었던가 어른거리는 기시감을 느끼며.
3번을 헤어졌다, 만났다 반복한 Y와 그 남자는 결국 결혼했고 지금까지 서로 의지하며 잘 살고 있다.
Y는 아직도 시내에 들를 일이 있으면 가끔 종각에서 명동까지 걷는다고 한다.
특히 지나간 시절을 슬쩍 들여다보고 싶을 때면 무조건 걷는 게 옳단다.
본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생각을 했던 사람인지 돌이키다 보면 빡빡한 오늘 살이에 어느새 틈이 생기며 모든 게 다 잘 흘러갈 것 같은 느낌, 걷다 보면 그 느낌을 잡을 수 있어서 걷는다.
이제 종로서적도 그때 그 카페도 없다. 그리고 종각에서 명동까지 올라가는 길 사이엔 청계천 복원으로 완전
다른 느낌의 길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주변은 바뀌었어도 큰길은 여전하다.
그리고 그때 그 시간도 Y가 걷는 길엔 여전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