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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ntie J Jul 08. 2021

오롯이 혼자,  꿋꿋이

소월길


남대문이 보이는 회현동에서 남산 쪽으로 올라간다.

오르막길이라 수월하지가 않다.

그러나 E는 가을 가운데로 들어왔다 싶으면 무조건 남산 길로 걸어서 퇴근을 한다.

그래서 출퇴근 배낭엔 운동화가 필수품이다.


걸어서 20분 정도면 먼저 용산 도서관이 나온다.

용산 도서관 앞 버스 정류장까지 왔으면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다. 소월길, 한남동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길은 이미 노란 은행잎으로 뒤덮여 발아래 보도 블록조 차 보이질 않는다. 눈앞 멀리까지 온통 노랗다.

걷기가 시작되는 가을 초반, 올라오기 시작하는 은행 냄새에 살짝 미간이 찌푸려지나 싶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그것도 익숙해져 별 문제가 되질 않는다. 냄새 정도에 포기할 길이 아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10월 중순으로 향하면 볕 방향에 따라 군데군데 남아있던 초록이 온통 노랑을 뒤집어쓴다. 넘어가는 해의 마지막 빛이 은행 잎 사이로 지나갈 때면 걷다가도 그냥 멈춰야 한다. 더 노랗게 더 진한 은행잎으로 변하고 있는 순간이다.

늦가을이면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비 온 뒤 스산한 기운과 바람이 나무를 감싸 휘몰면 은행나무는 걷는 사람 누구라도 덮어 버리듯 우수수 몸을 털어낸다.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노란색을 뒤집어쓰며 걸어간다.

끝이 없는 은행잎 길, 온통 노란색이다.     


40여분을 걸어 큰 호텔이 보이면 노란 길도 끝이다. 머리가 산란하고 마음이 멍할 땐 길을 건너 다시 한번 왔던 길을 반복한다. 겨우 길하나 건넜지만 건너편 길과 또 다른 은행 잎 길이다. 한 번 더 반복하지 않는 날은 걸으며 마음이 진정돼 그만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도 될 것 같은 날이다.

귀가 길은 호텔 옆길로 내려가 산 아래 동네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다시 30분 정도 걷는다.

산에서 내려가는 길이니 계단도 많고 경사진 골목도 많다. 그러나 여기는 이태원! 골목 사이사이 구경거리가

많다. 한남동을 넘어 들어온 이태원을 구경하며 내려오다 보면 어디라도 갈 수 있는 버스도 많고 지하철도

탈 수 있는 아랫마을이다.       


‘인생은 스케이트장이야. 수많은 사람이 넘어지거든..’ 영화 대사다.

E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 수많은 사람이 넘어지는 게 아니라 누구나 넘어지는 게 인생이라고.

누구에게라도 꽃길만 펼쳐지는 인생은 없다.

언제 어느 대목일지 모르지만 누구라도 미끄러져야 공평하고 그래야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스케이트장이면? 들어서자마자 넘어지더니 일어서려는데 또 미끄러진다.

와당탕 자빠지고 앞으로 넘어지고 엉덩방아도 찧는다.

그냥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넘어지다 끝나는 스케이트 장. 최악이다.  


학교를 졸업하면 아예 다른 인생이 시작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을 다니는 줄곧 졸업 후 먹고 살 생각만 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보다 더 머리가 아픈 게 졸업하고 나서라고 모두들 말했다. 그러나 머리가 아픈 것도 사치. 뭐라도 해야 하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여야 그나마 부모님께 덜 죄송할 것 같았다.

하지만 졸업을 하고도 재수를 해서야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누구라도 직장을 갖는 일이 쉽지 않았으나 E는 한번 넘어졌다 생각했다.

그나만 다행은 번듯한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빠질 만큼은 아닌 회사라고 생각해 넘어지고 일어난 것 치고는

상처가 덜한 편이라 여겼다.


그러나 기쁨과 안도도 잠시. 다시 스케이트장에 들어서야 했다. 실수도 많았고, 질책도 많았다.

움츠려 들었고 기운도 빠졌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못할 짓 같았다.

어딘가로 잠시 피해 다음을 도모하는 게 맞다 생각했지만 이제 겨우 입사 2년 차. 잠시 피하거나 주춤할 시기가 아니라고 모두 입을 모았다. 혹은 누구의 말도 듣지 말고 내 안의 소리에 집중하라고도 했다.

그런데 내 안의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른 누구의 소리도 잘 들리질 않는다.     


그래서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고 어떻게든 해결해봐야 할 것 같아서.

걷고 또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다음 길이 보일 것 같아서.

그런데 은행잎 앞에선 모든 생각이 멈추고 오직 노란색만 보였다.

물이 빠진 은행잎을 밟으면 바스락 대는 소리에 집중하게 되고,

양쪽으로 갈라진 은행잎을 눈으로 따라 그리다 보면 정리고 뭐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냥 걷다 보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가능했다.

정리를 위해 걸었더니 멈춤이 왔고, 잠시 멈추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당장 해결된 일은 없었지만 천천히 조금씩 힘이 자라나고 있는 건 느껴졌다.

스스로를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힘. 이제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고 싶은지

조금씩 정리해 나가려고 하고 있다.         

 

인생은 스케이트장이다.

수많은 사람이 넘어진다.

누구는 몇 번 더 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

어떻게든 혼자 일어나 달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조금 더 늦게 달리든 빨리 달리든 중요하지 않다.

넘어지다 일어서다 몇 번을 하든 언젠가는 신나게 얼음 위를 달릴 순간이 오고 말 거다.


소월길 옆 보도는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걷기엔 좁다. 혼자 걷다가도 누군가 달리는 사람이 있으면 슬쩍 길을 비켜줘야 한다. 그래서인지 혼자 걷거나 뛰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다행이다. 오롯이 혼자 걸을 수 있어서.

올해 가을도 E는 어김없이 소월 길을 걸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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