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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ntie J Jul 08. 2021

할 일없고 놀 곳 없던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던.

:집까지 계단 길

어림잡아 8,9층 정도 계단을 올라야 우리 집이다. 그중에서도 제일 꼭대기 마지막 집.

엘리베이터는 구경도 못해 본 1970년 대 말. 그러려니 올라가는 수밖에.

높아도 반듯하고 경사가 적당한 계단 길이었다면 덜 힘들었을 텐데 산을 대충 깎아 만든 동네의 갈 곳 없는 돌과 시멘트를 섞어 대충 놓은 계단은 경사도 폭도 제각각이라 어디쯤에선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래도 3층 정도까지는 올라갈 만했다. 경사도 완만하고 중간중간 쉬기 좋게 평평한 곳도 두어 군데 있어

지루하지도 고되지도 않았다. 여기서부터 집으로 가는 길이 갈린다. 좁은 골목길 안 삼거리 정도 되겠다.

살짝 왼쪽으로 틀면 갑자기 경사가 급한 계단 길이 나오는데 90도라 우기면 우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직진을 하면 더 이상 계단이 없고 누런 흙길로 쭉 오르막. 흙 길은 마른날이면 흙먼지가 풀썩여 지나만가도

누런 먼지를 뒤집어써야 했고, 조금이라도 흐려 비가 오면 진창에, 눈 내리면 빙판길로 변해 지나기가 영

불편했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되는 탓에 엄마는 양 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어야 할 때면 어김없이

흙 오르막길로 집 뒷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그러나 짐이래야 등에 맨 가방에 수시로 던졌다, 휘둘렀다 용도를

벗어난 신발주머니가 전부요, 날씨 정도에 구애받을 나이가 아니었던 우리 형제는 열 번이면 열 번, 항상

계단으로 집을 드나들었다.     

 

3층까지가 앞으로의 고행을 위한 숨 고르기 정도였다면 얼추 4층부터는 본격적인 인내심과 지구력을

시험해 볼 구간이라 하겠다. 갈림길부터 확연하게 경사가 심해진 계단은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꼭대기까지

계속 이어진다. 폭이라도 넉넉하면 계단 중간에서 숨이라도 돌릴 수 있었겠는데 설렁설렁 오를 수 있는

3층까지의 배려는 오간데 없고 마치 어디 한 번에 오를 수 있나 두고 보자 하는 것처럼 배려 없이 가파르다.

그러나 배려 없이 가파르기만 한 계단이 딱히 할 일 없고 놀 곳 없던 어린 시절 우리에겐 가장 좋은 배려였다.


특히 장대비만 쏟아지면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문 밖을 뛰어나가 계단 양 끝에 매달려 있기 일쑤였다. 우리 집은 물론이요, 같은 동네 집이란 집은 죄다 축대를 끼고 있었는데 산인지 고개인지 댕강 잘라 마을을

만들었으니 분명 비가 오면 걱정이었겠다. 그러니 계단을 가운데 두고 양 쪽 끝엔 마치 배수로처럼 길을 내

비가 오면 물이 아랫동네로 흘러내릴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바로 이 빗물 길이 우리의 최고 놀이터였다.


비가 조금이라도 많이 오는 날이면 대체 어디서 그 많은 빗물이 내려오는 건지 계단 양쪽 길은 계단 쪽으로

물이 넘칠 만큼 콸콸 흘러내렸다. 아마도 시작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내려오는 물에 아차 발을 적셨거나,

혹은 신발을 신은 채 물속에 발을 담그면 어떨까 몹시 궁금했던 날이었을 거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미 운동화 속으로 물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하면 웬만해선 그만둘 수 없는 장난질로

빠져든 거다. 차가운 느낌에 처음 어느 순간만 화들짝 놀랐지 드디어 시작이다. 신발 사이로 꿀렁 들어오고

나가는 물의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물이 들은 채 신발을 저벅거리는 건 또 얼마나 재미있나! 운동화와

발 사이로 이상한 소리를 내며 물이 빠져나가질 않나, 걸을 때마다 덤벅 덤벅. 거기에 물 길 한가운데

‘척’하고 가로질러 발을 걸치면 완전히 새로운 장면이 펼쳐진다. 콸콸콸 내려오던 물줄기가 작은 발을 휘돌아

넘치며 크고 작은 폭포를 만들고 투둑 투둑 아래로 떨어진다. 어떤 날은 흙탕물이 내려오기도 했고 시커먼

물이 흘러넘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그 물이 어디서 내려오는 건지 궁금하지도 더러울까 봐

걱정하지도 않았다. 한두 시간 지나면 들고 있던 우산은 이미 계단에서 나뒹굴어 저 아래 팽개쳐져 있고

이미 온몸은 흠뻑 젖어있다.

이쯤 되면 드디어 엄마 얼굴이 떠올랐겠다.

그만둬야 할 시기를 적당히 맞추면 일진이 좋았겠지만 잠시 잠깐 사이를 놓치면 등짝 한 대 맞고 남은 하루

조용히 지내는 수밖에. 젖은 머리가 마르고 온몸이 으슬으슬해지면 나도 모르게 졸다가 한 잠 푹 자고 일어나

못다 한 숙제에 바빴다. 

 

어디 이런 즐거움이 여름 장마철뿐이었겠나. 싸늘한 바람이 아직 남아있는 초봄의 오후, 혹은 늦가을의 저녁

정도엔 계단의 제일 위부터 계단의 가장 아래까지 단 한 번에 뛰어 내려오는 ‘계단 비행’에 흠뻑 빠져 있었다.

물론 말이 ‘비행’이지 뛰어 내려오는 행위, 그러니까 그냥 계단을 매우 빠르게 뛰어 내려오는 거다.

비행에 적당한 옷차림이나 신발은 따로 없다. 가능하면 더 빨리 달려 내려올 명분이 있는 급한 심부름이 있으면 더욱 좋았고, 아니어도 비행 자체의 쾌감이 굉장해 다시 올라올 일 정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첫 시작부터 무작정 달리는 건 무리가 있다. 일단 계단이 가파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냅다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가 없다. 그러나 발부터 온몸까지 계단의 간격이 익숙해지면 서서히 가속도가 붙는다.

폭과 경사가 다른 계단 근처에선 뛰는 게 아니다. 날고 있다. 경사가 다를수록, 폭이 다른 계단 부근일수록

착지에서 재도약까지 높아지면서 겅중겅중, 점핑이다. 비행 마지막 즈음엔 계단 3개 정도는 한 번에 뛰어넘을 정도로 가속도가 붙어 아마도, TV에서 늘 겅중거리며 뛰고 있는 톰슨가젤처럼 뛰고 있지 않았을까.


비와는 또 다른 느낌의 중독이었다. 날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내 몸은 스프링처럼 훌쩍 치솟아 잠시 잠깐

공중에서 붕 떠 있다. 그러다 풀썩 떨어져 버리면 어쩌려고?.. 그런 걱정 따윈 없었다. 내 발은 어느 부분을 딛고 다시 하늘로 높이 날아오를지 이미 너무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슝! 날아오르는 순간, 코끝과 얼굴은 알싸해서 찌릿하다. 아직 지나가지 못한, 혹은 다가오고 있는

차가운 계절이 잠깐 내 안으로 훅 들어오는 느낌.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해 잊히질 않는다.

난 그때 분명히 날고 있었다.         

  

은퇴를 준비할 즈음이 되니 정착해서 살 곳을 생각하게 된다. 아침저녁으로 걷기 좋고 공기 좋은 곳을 찾으니

너무 한적해 생활하기 불편할까 걱정이고, 교통과 편의시설을 염두에 두고 따지니 무엇보다 번잡해 싫다.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 산다 하면 예전 계단 집은 누구라도 살기 불편한 집이었다. 대중교통이든 시장이든

편의시설과 가깝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계단은 고된 하루를 달래러 돌아오는 아버지의 다리를 엄마의 무릎을

더 고되게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런 계단 집이 그 고되기만 한 계단 길이 아직도 난 잊히지가 않는다.

아마도 어디에 정착을 해도 무슨 용빼는 재주를 부려도 하늘을 날 수는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 일거다.   


올 해는 이사를 해야 한다.

집을 옮긴다고 해야 큰 변화는 없다. 더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내려가겠지. 집이 높은 곳이면 전망이 좋아

속이 시원하겠다지만 전망이래야 빼곡한 상가 지붕이나 비슷비슷한 아파트 무리들로 가득한 빌딩 뷰가 전부다. 그러니 어디로 이사를 한 들 큰 기대가 없다.

어차피 날지도 못할 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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