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여자였구나!
산악 동호회를 가입했다. 간신히 오른 산 위에서의 상쾌함은 잠시, 정상에서 벌어지는 아저씨들의 술판은 상당히 불쾌했다. 열심히 운동하고서는 벌게진 얼굴에 술냄새라니… 걷기 동호회로 옮겼다. 산악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젊은 사람들도 꽤 있었고, 활기차고 밝았다. 몇 번의 걷기 모임에도 나가고 후기도 쓰며 열혈 회원처럼 지내다 제주도 한 달 살기를 떠났다.
올레길을 혼자 십오일 넘게 걷다 보니 무료해졌다. 걷기 동호회 번개 게시판에 ‘혹시 제주에서 올레길 함께 걸으실 분 계실까요?’ 하고 글을 올렸다. 마침 자신도 근처 7코스를 걸을 예정이라며, 반갑게 만나자는 메시지가 왔다.
다음 날 7코스에서 만난 사람은 내 또래의 남자였다. 난 당연히 또래의 아줌마를 상상했고, 그는 당연히 십오일 넘게 올레길을 혼자 걷는 사람이 남자일 거라 생각했단다. 둘 다 예상이 빗나가 뻘쭘했지만 그냥 걸었다. 걷다 보니 그는 왜 이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는지 아픈 사연을 털어놓았다.
회사에서 ‘나가라’는 말보다 더한 대기발령, 법무팀에서 건설파트로의 황당한 보직 변경, 자존심은 상하지만 관둘 수도 없다는 현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편으론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제주의 풍광 때문이었을까, 올레길의 동행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생각보다 훨씬 잘생긴 외모 때문이었을까. 조금 설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종료 지점에서 가볍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정말 그게 끝이었다.
그가 서울에서 3개월 뒤 연락해 오기 전까지는.
3개월 만에 뜬금없는 문자가 왔다.
그때 제대로 인사 못하고 헤어진 게 미안했다며, 7시간이나 걸으면서 밥 한 끼 못 사준 게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퇴근 후 식사라도 하자며 조심스레 청해왔다.
조금 당황했고, 조금 설레었다.
그를 만나러 가며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머리를 쓸어 올렸다가, 립스틱을 발랐다 지웠다. 그러다 혼자 피식 웃었다.
‘야… 너 유부녀야. 정신 차려. 지금 뭐 하는 거야?’
하지만 또 생각했다. 꼭 마음을 품어야 설레는 건가? 그냥 그럴 수도 있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기억보다 그는 더 컸고, 더 젊었고, 더 잘생겼다.
도대체 올레길에서 그에게 어떤 위로를 건넸기에, 밥까지 사겠다고 했을까.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의 근황을 나눴다. 그러다 내가 여류 화가 지인과 북촌 부티크 호텔에 묵었던 이야기를 하는데, 그가 훅 들어왔다.
“왜 화가님만 그렇게 좋은 데 재워주세요? 저도 재워 주세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지? 지금 농담인가? 진심인가?’
웃으며 넘기려 했다.
“아~ 네, 다음에 기회 되면 방 잡아 드릴게요, 호호.”
하지만 그는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혼자서는 안 가요.”
침묵이 흘렀다. 그는 농담이 아니었다.
명백한 추파였다. 짧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내가 그렇게 가벼워 보였나? 아니면 저 사람이 미친 건가? 왜 나한테…?’
삼겹살 굽는 냄새, 소주에 붉어진 그의 얼굴, 고기 불판 너머로 스치는 남자의 스킨 냄새가 이상하게 뒤섞였다.
‘아… 이 위기를 넘어가야 한다.’
동호회 활동이 어색하지 않게, 그가 불쾌하지 않게, 혹시 내가 오해한 거라면 자연스러운 농담처럼.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웃어넘겼다.
“아이고 고마워요. 이게 얼마 만의 추파야~ 아직도 여자로 보이긴 하나 보다, 하하하. 그럼 제가 살 빼고 올 테니 섬씽은 3개월 뒤에 합시다~ 하하하!”
호들갑을 떨며 자리를 정리했다.
돌아오면서 한편으론 ‘내가 어디서 헤퍼 보였나’ 자책하다가, 또 한편으론 ‘그래도… 여자라고, 잠깐 설레긴 했지’ 싶어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래, 오십이 넘어도 여자는 여자다. 가벼운 농담에도 가슴은 뛴다.
그러면서 콤팩트를 꺼내 주름진 얼굴을 두드려댔다. ‘이놈의 주름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야 정신이 차려졌다.
설렘도, 선도, 현실도 모두 담아 거절의 문자를 보냈다.
그에게도 마지막까지 ‘멋진 여자’로 남고 싶은 마음을 한 줄에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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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미 씨앗
키워 보지 않겠냐며
누군가 씨앗을 건넸다.
가끔 기웃거리던 남의 담장,
햇볕 아래 활짝 웃던 장미.
씨앗과 꽃 사이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게을러 물 주는 걸 잊어버릴까 봐,
먼지 낀 잎을 닦는 법을 잊을까 봐,
햇볕 적당히 쬐어주는 일을 잊을까 봐.
화분 둘 자리도,
화분을 돌볼 시간도 없는 나는
담장 밖으로 흐드러지게 드리운
남의 장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내 손바닥 위의 씨앗은
그냥 씨앗으로 두련다.
언젠가 꽃이 될 일도 없다.
담장 안 장미는
그 주인의 사랑으로 핀 꽃.
나 또한 누군가의 담장 안에서
이미 피어 있는 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