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야기
손끝을 잡혔다. 잡힌 손끝으로 짜르르 따뜻한 전류가 흐르듯 손목을 지나고 어깨를 지나 나의 볼을 붉게 물들였다. 태연한 척 고개를 반쯤 돌려 숙였고 애꿎은 신호등 옆에 서있는 소나무 홈을 손톱으로 긁고 있었다. 좋아하는 이와 길을 걷고 있다는 것, 무심하게 쓰윽 낚아채듯 잡힌 손끝에서 그 사람의 스킨향이 살며시 올라왔다. 그렇게 내 사랑은 시작됐다.
매일이 천국이었다.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그의 편지를 기다리고 그를 만나러 갈 땐 늘 뛰어갔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두리번거리다 그를 발견하고 눈을 마주치면 저절로 함박웃음을 지어졌다. 그를 덥석 안았다. 그의 스킨향이 코로 훅 들어왔고 익숙한 냄새에 안도했다. 쿵쾅거리는 심장은 잦아들었고 따스해졌다. 매일 이 안도감이 함께하면 좋겠다… 난 이 소원은 소박한 것이라 이뤄질 것이라 믿었다.
몇 개월이 흐른 후 그는 더 이상 나를 보고 웃지 않았다. 손도 잡지 않았다. 그에게선 익숙한 스킨냄새도 나지 않았다. 난 늘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왜 그러는지를 물었지만 의무감처럼 정해진 코스대로 저녁을 먹은 후 헤어졌다.
혼자 김천 직지사를 가게 됐다. 넓은 절 마당에는 신기하게도 사람이 없었다.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직지사의 넓은 마당 중앙 탑 위로 빗방울들이 부딪치며 떨어졌다.
‘꼭 내 마음 같누’
비를 피해 절 처마 밑에서 발끝으로 툭툭 땅을 차고 있는데 저 멀리서 승복자락을 휘날리며 키가 꽤 커서 장군처럼 보이는, 딱 봐도 높은 지위에 계실 것처럼 보이는 스님이 큰 골프우산을 쓰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스님은 성큼 내게 와서 우산을 씌워 주며 말을 건넸다.
-우리 보살님은 전생에 나랑 무슨 인연이었을까? 우리 직지사 처음 왔어요? 직지사 어디가 맘에 들어요? 그나저나 나랑 차 한 잔 할래요?
-예?
난 속으로 절들은 다 이러는 건가? 고민하다 뭔가 이 전개를 타고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결정을 했다.
그분을 따라 여러 개의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굉장히 넓은 방이 나왔다. 여기서 지내신다고 했다. 잘 차려진 다기가 놓인 엄청나게 긴 원목 탁자가 인상적이었다.
-뭔 고민 있어요? 내게 들려줘봐요. 또 압니까? 즉시 해결이 될지?
넌지시 물으시는 스님께 답답한 나의 사랑을,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가는 중인 내 연인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남자가 싫증이 난 게야!
‘싫증… 싫증이라는 말이 생소했다. 내게 싫증이 났다고? 누군가에게 싫증을 나게 하는 사람이 되리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여자인 내가, 이성에게 싫증이 나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충격이었다. 싫증의 관점으로 내 요즘의 상황을 돌이켜보니 웃지 않는 그의 얼굴이, 무심한 그의 말투가, 의무적인 전화 태도가, 늘 정해진 매뉴얼처럼 뻔 한 데이트가 이해가 됐다. 너무 아프지만 비로소 풀리지 않던 의문들이 그 한마디에 ‘스르륵’ 빚장이 열리듯 풀어졌다. 눈물이 났다. ‘내가 싫증이 나서… 그랬던 거구나’ 스님은 눈물을 흘리는 내게 휴지를 건네며 마음을 어지럽히는 번뇌는 삽으로 떠 저 바다에 던지라고 말했다. 사람의 애정은 ‘갈애’여서 절대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하루는 108배를 하고, 하루는 좌선을 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매일 반복하는 것도 지겨울 기운이라며 두 수행법을 병행하라 했다. 나는 학문으로 도를 깨우치는 사람이 아니라 경험으로 ‘도’를 깨닫는 사람이니 모든 경험이 ‘공부’라고 하셨다. 이야기는 밤까지 이어졌고 비 온 뒤 맑아진 까만 하늘, 휘영청 밝은 달빛을 따라오신 스님의 배웅을 뒤로 한채 기차역으로 향했다.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동안 내게 전하지 못했을 그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내용과 내게 소중한 기억 많이 남겨줘 고마웠다는, 이별의 편지였다. 자유를 줘야겠다… 참으로 아름다운 기억이었고 내가 상처받을까 꾹 참기만 한 그 사람에게 미안해졌다. 싫증이 난 사람에게 차마 헤어지자는 말을 못 하고 있었을 그 마음이 애달팠다. 영문 모를 때의 답답함이 이유를 알게 되자 명쾌함으로 바뀌었고 난 그를 보낼 준비가 되었다.
그 후 꽤 시간이 흘러 불현듯 익숙한 스킨향이 떠오르면 108배를 했다. 갑자기 그가 내게 했던 아주 우스운 이야기가 떠올라 피식 웃음 짓다 놀라서 감정을 추스르며 ‘좌선’을 했다. 내 마음과 감정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 황량한 마음을 계속 목도했다. 슬퍼지려 할 때마다 이 감정의 끝에 끝끝내 내가 쥐고 놓지 않는 아쉬움을 빙자한 내 갈애를 봤다. 내 아픈 사랑이 오히려 나를 공부시키고 있었다. 사랑이라 믿고 있던 온갖 욕망이 내 감정을 온통 쥐고 흔들려고 할 때마다 난 두 수행법을 울면서 했다.
아주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난 여전히 명상을 하고 있다.
늘 감정은 일어나지만 저절로 사라지는 기다림이 이젠 좀 익숙하다. 가만히 바라보면 결국에는 사라진다. 경험으로 ‘도’를 닦는 사람…
오늘도 수많은 경험들이 나를 성장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