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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썩

내 몸의 나의 것

by 명선우

방금 뭔가 뜨거운 것이 내 따귀를 지나갔다. 순간 눈앞이 핑~ 어지러웠다.


"야잇 썅년아!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그 정도는 알고 온 것 아니었어??"


군인처럼 짧게 스포츠머리를 했던, 아까까지 친절했던 남자는 목욕탕 그림이 그려진 곳으로 들어온 뒤로는 무서운 사람으로 돌변했고, 나에게 따귀를 때리며 하는 말이었다.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을 갔었다. 우리는 4명이었고 남자는 2명이었다. 내가 안심했던 것은 월등히 많은 여자 비율이었고, 그들은 누가 봐도 착한 사람처럼 보였기도 했다.


재밌게 놀다 나왔고 2차를 가자고 했다. 자기들이 아는 곳이 있으니 차를 타고 움직이자 했다. 여자애 3명이 먼저 올라탔고, 장소 안내를 위해 한 명의 남자는 앞차에, 남자 한 명과 내가 뒤차에 탔다. 앞차를 잘 따라가는 듯 보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앞차가 보이지 않았다. 남자도 당황하는 것 같았다.


잠시 택시를 세우고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했고, 길을 잘못 들어 아까 봤던 첫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다시 택시를 타고 첫출발을 했던 장소로 돌아왔다. 내 친구들은 거기에 없었다.


이미 시간은 새벽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새벽 날씨는 추웠고 친구들은 아직 장소에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도 나도 뻘쭘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자기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그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목욕탕 마크를 가리키고 들어가서 추위만을 피하자고 했다. 내 친구 3명이 이리로 오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했고, 나는 아무 의심 없이 그 남자를 따라 모텔로 들어갔다.


근데... 그것이 내가 그 사람에게 성적 동의를 했거나 폭력을 감내해야 할 이유는 될 수 없다.


그 남자는 내 옷을 찢겠다고 위협했다. 그럼 부끄럽지 않냐고, 순순히 자기 앞에서 옷을 벗으라고 했다. 다시 한번 나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도 나는 이 남자가 무섭지 않고 가소로워 보였다. '시발... 오늘 죽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오늘 이 새끼랑 죽어 버려야겠다는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그 남자의 복부를 발로 차고 내 블라우스 앞섶을 거머쥐고 냅다 "살려주세요! 이 남자가 저를 죽이려고 해요!!!"라고 외쳤다. 문을 두들기고, 소리를 치고, 내게 달려드는 그 남자의 손을 깨물었다.


맞다. 내가 눈깔이 돌아간 것이다. 자발로 모텔을 따라 들어올 때 이 정도 각오를 하지 않았냐는 그 황당한 전제가 내게 "그래서 넌 내 손에 죽는 거다"란 결론을 도출해 내다니...


젊은 치기였지만, 다행히 그 정도 해프닝에서 질린 남자가 나를 놓아주는 바람에 빠져나왔다. 하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이것이 얼마나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황당하고 어이없는 억울함을 선사했을지 분노가 치민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얼굴이 얼얼하다.


아직도 그 새끼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른다. 그리고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지... 새벽녘 부어오른 얼굴을 감아쥐고 뜯어진 앞섶을 움켜쥔 손 위로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그 새끼 가랑이를 더 세게 걷어차지 않은 것에 화가 났고, 헐레벌떡 나오느라 챙겨 나오지 못한 내 꽃핀이 아까워서... 그리고 이런 모습으로 돌아간 집에서 날 볼 엄마가 걱정되어서 그렇게 자꾸 울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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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고 십몇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우연히 본 뉴스 헤드라인. "모텔 따라간 여성, '동의했다' 무죄 판결 논란". 손에 쥔 스마트폰을 통해 기사를 읽어 내려가는데,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모르는 여자의 이야기인데, 마치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피해자는 자발적으로 모텔에 들어갔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한 정황이 부족하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이 성관계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지하철 손잡이를 붙잡은 내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그날 그 모텔 방에서 내가 느꼈던 공포와 분노가 다시 나를 덮쳤다. 기사 댓글은 더 끔찍했다.


"왜 따라갔어?"


"모텔 간 여자가 뭘 기대했겠어?"


"꽃뱀 아니야?"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날 밤 살아남은 것은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분노와 오기가 나를 구한 것이라는 사실을. 많은 여성들이 얼어붙거나 충격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문을 두들겼다. 그것이 나를 구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순간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포에 마비되고, 충격으로 얼어붙고, 더 큰 폭력이 두려워 순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것이 동의는 아니다. 법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동의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명확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위협과 강압 아래 이루어진 어떤 행위도 진정한 동의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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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숍에서 만난 후배가 늦은 밤 택시 탈 때 불안하다고 했을 때, 클럽에서 만난 남자가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며 불안하다는 친구에게, 나는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네 직감을 믿어."


가끔은 그날 밤 '죽자'는 심정으로 저항했던 내가 어이없다. 하지만 그 순간 내 안에서 터져 나온 생존 본능과 분노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 '철썩'이라는 소리는 내게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내 뺨을 때린 소리가 아니라, 침묵과 순응에 대한 거부의 소리다. 내가 지금 참으면 이 순간의 선택이 상대에게 또 다른 범죄 기록이 되고, 여성은 저항할 수 없다는 잘못된 통념을 강화시킬 것이라는 깨달음의 소리이기도 하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과 강압은 정당화될 수 없다.


내 얼굴에 남은 그날의 따귀 자국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아직도 그 나쁜 남자의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이럴 거라는 거 알고 온 것 아니냐?'는 말이 귓가에 맴돈다.


그 질문에 오늘의 나는 당당하게 대답한다. "아니,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설령 알았다 해도, 그것이 네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은 오직 나에게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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