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순수라는 이 단어를 들으면 나의 언니와 방한화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매 방학 때마다 언니와 나는 시골집으로 놀러 갔다. 도시에서만 살았던 우리에게 시골, 특히 깊은 시골인 ‘춘산’에서의 시간은 어른이 된 지금도 많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겨울, 춘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침 멀리서 교회 차임벨이 울렸고 우리는 습관처럼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언니와 나는 주일학교를 다니던 착하고 어린 신자였기에, 멀리 춘산에서도 주일학교를 가기 위해 졸린 눈에서 눈곱을 떼고 방한화를 신고 차임벨이 울리는 저 멀리 보이는 교회 첨탑을 향해 밭두렁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날 아침 서두른 탓에 벙어리장갑을 끼고 나온 것을 깜빡한 나. 생각보다 날씨는 너무 매섭게 추웠고 방한화를 뚫고 얼음처럼 찬 기운이 내 엄지발가락을 얼얼하고 쓰리게 만들었다. 어느 집 처마 밑 햇볕이 그나마 내리쬐는 곳에서 손을 호호 불며 추위에 반항해 보았지만 햇빛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추운 바람에 어린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나보다 2살이 많은 언니는 추워서 빨개진 내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많이 추워? 울지 마. 얼굴 얼어”라고 말하며 빨갛게 얼은 내 얼굴을 손으로 감싸주었고, 다시 빨갛게 얼은 내 손을 자기 주머니 속에 넣어주었다. 언니의 윗옷 주머니 안은 따뜻했다. “언니야, 따뜻하다!”라고 답했지만 나는 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정말 정말 발이 너무나도 시려 따갑고 아팠다. “심아, 언니가 방한화 벗어줄까?” 언니는 나에게 따뜻하게 데워진 자신의 방한화를 벗어주고, 작아서 발을 끝까지 넣을 수 없는 내 방한화를 구겨 신고 내 발이 따뜻해지기를 처마 밑 고드름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기억이 얼마나 선명한지 그 후가 어찌 됐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 그 처마 밑에서 내 방한화를 구겨 신고 어린 동생을 달래주던 언니의 방한화 안 따뜻한 온도는 두고두고 기억이 난다.
나보다 겨우 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어린 여자아이였을 텐데, 언니는 그런 따스한 사랑을 받고 자랐을까? 그 순수하고 착한 언니가 선사해 준 기억은 팍팍하게 살아가는 요즘, 그날의 겨울 날씨만큼 추운 세상살이에서 살아볼 희망을 갖게 하는 ‘온기’가 아닐까?
나는 순수함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차갑게 부는 겨울바람이 비켜갔던 춘산, 어느 집 담벼락 처마 밑에서 언니의 방한화의 온도를 떠올리게 된다. 선뜻 어린 언니가 더 어린 나를 챙기기 위해 내줬던 방한화만큼 무언가를 주려던 내 마음이 이젠 전달될 수 없는 거리가 되었지만, 여린 순수함과 따뜻한 온도를 가진 언니가 겨울 차가운 바람 같은 ‘삶’을 잘 견디며 이 삶을 살아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