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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이 가져온 불씨

수박은 금이 갔고 온 가족에게 균열이 생겼다.

by 명선우

또 시작이다.

시어머니는 화를 속에만 담아두지 않으신다. 꼭 꺼내 말로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다. 시작은, 수박 한 덩어리 때문이었다.


남편이 사 온 수박을 김치 냉장고에 넣고 싶으셨던 어머니는, 게임 파티 중인 손자에게 부탁하셨다. 게임에 집중하던 아들은 입을 삐죽 내밀며 마지못해 수박을 들었고, 그만 거실 바닥에 떨어뜨렸다. 수박 꼭지가 떨어지고, 겉껍질에 금이 갔다.


크게 보면 큰일이고, 작게 보면 별일도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말 한마디가 그 일을 온 집안을 불태우는 불씨로 만들어버렸다.


저녁.

갑자기 아들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가 이 노인네를 죽여버리고 나도 죽겠다.”


헉.

무슨 맥락에서 보낸 건지 알 수 없던 나는, 퇴근하자마자 달려왔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아들은 씩씩대고 있었고, 나는 황급히 방문을 닫아 어머니와 거리를 두게 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아들의 말에 따르면, 시어머니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손자가 수박을 떨어뜨려 박살냈다고 전하셨고, 사정을 모르는 남편은 아들에게 호되게 화를 냈다고 했다.


“게임 중간엔 멈출 수 없어. 내가 그 파티를 여는 길드장이야. 그런데 왜 꼭 그때 수박을 옮기라고 했던 거야? 꼭 당장 해야 했어?”


그 수박은 금만 갔을 뿐, 깨진 것도 아니었다.

확인해보니, 말 그대로였다. 금만 갔다. 속은 멀쩡했다.


나는 안다.

게임을 하지 않지만, 그 안에도 질서가 있고 예의가 있다는 걸.

하지만 그 문화를 모르는 어머니와 남편 눈엔 아들은 그저 할머니 말을 무시하는, 싸가지 없는 아이였던 것이다.


아들을 달래며 연로하신 할머니를 이해하자고 말하던 그때, 시어머니가 아들의 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셨다.


“할미를 업신여겨도 유분수지! 저 놈이 눈을 부라리며 씩씩댄다! 저 눈 좀 봐라, 싸가지 없는 놈!”


겨우 어머니를 방으로 모시고 난 뒤, 나도 결국 소리를 높였다.


“어머니! 지금 상황 듣고 계시잖아요. 사실은 사실대로 보셔야죠!”


화에는 화로 대응해야 진화되는 밤.

그러고 보면, 이 모든 갈등에도 마음 한가운데 있는 건 사랑이었다.


시어머니는 아들이 사 온 수박을 시원하게 해 두었다가, 퇴근한 아들에게 건네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아들은 욕을 먹어가면서도 게임을 멈추고 수박을 옮겼다.

그리고 나는, 두 사람의 감정 사이에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중재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가 산불처럼 번졌다.

온 집안이 시끄러웠고, 감정은 극단까지 치달았다.

겨우 아들을 진정시키고, 어머니 방 문을 두드렸다.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셨던 어머니는 다시 손자의 버릇없음을 토해내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자 사용법’을 전해드렸다.


– 과장된 표현은 자제해주시고,

– 남편에게 바로 전화하시기 전에 한 박자 쉬어주셨으면,

– 그리고 게임도 문화임을 알아주시고,

– “몇 분 후 끝나면 옮겨줄 수 있겠니?” 하고 말해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러자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아주 상전이 났구나, 상전이야!”


합가 이후 고요했던 집.

어르신 한 분을 모시고 산다는 건, 이렇게 매일 화를 내며 살아야 하는 일인가.

그리고 이십 대 혈기왕성한 아들이, 자기 체구의 반도 안 되는 할머니의 꾸짖음을 들으며 씩씩거릴 때—‘혹시 저러다 진짜 화를 못 참는 건 아닐까?’ 싶을 때, 그 감정을 나는 어떻게 달래야 하는가.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화’를 마주하고, ‘화’를 삼키고, ‘화’를 조용히 다스린다.


작은 불씨 하나가 온 집안을 잿더미로 만들기 전에,

어떻게 하면 더 지혜롭게 진화할 수 있을까.

오늘도 그 방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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