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한 원두막에서 게르로 나아가기까지
결혼 전, 용인 시아버지 댁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였다.
귀농하신 지 얼마 안 된 아버님은 자신이 홀로 지은 원두막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셨다.
잘 보이고 싶었던 나는 “너무 멋지다”며 입에 발린 칭찬을 했지만, 사실 원두막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못질과 톱질은 어설펐고, 대체로 볼품이 없었다.
당신의 노고를 알기에 차마 말하진 못했지만,
누가 봐도 전문가의 솜씨는 아니었다.
요즘 나는 글을 배우고 있다.
글쓰기 교실에 처음 갔을 때, ‘동네 골목대장쯤은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대충 글을 써냈다.
그런데 첫날, 빨간 펜으로 도배된 내 글을 마주했다. 띄어쓰기, 맞춤법은 물론이고,
“왜 여기서 문단을 나누셨나요?”
“왜 이런 뜬금없는 표현을 쓰셨죠?”
이런 지적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 빨간 비 위로 지도 작가님의 날카로운 말들이 떨어졌고,
그 위로 부끄러움이 겹겹이 덮쳐왔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시아버지의 원두막을 바라봤던 그 시선으로, 지금 지도 작가가 내 글을 보고 있다는 걸.
내가 그의 불완전한 창작물을 속으로 비판했듯,
이제 내 글도 같은 시선 아래에 있었다.
만약 글이 집이라면,
그날은 내가 만든 집을 멀리서, 입체적으로 처음 바라본 순간이었다.
겉보기엔 집 같았고, 알록달록 색도 칠해져 있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니 영화 세트장 같았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체는 없고, 껍질만 남은 집.
지도 작가님은 내 글의 상태를 꿰뚫어 보고,
마치 집 짓는 법을 가르쳐주듯 글쓰기를 다시 알려주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짓는 글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어야 해요.
돈을 주고 사고 싶은 집,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하다고 검증된 집이어야 합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날부터 나는 생각했다.
내 글이라는 집을 짓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뭘까?
설계도를 그리고, 사용할 재료를 고르고, 기둥을 세우고, 창과 문의 위치를 정한다.
그렇게 완성된 글은 어떤 비바람이 불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겠지.
동기들의 글을 보며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떤 사람의 글은 견고한 벽돌집처럼 튼튼했지만, 창이 좁아서 바깥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이는 좋은 자재로 집을 지었지만, 촌스럽고 유치한 페인트로 모든 걸 덮어버렸다.
또 어떤 이는 벽 한쪽을, 자신이 살아온 자랑거리로 가득 채웠다.
지도 작가님은 말한다.
“사람들이 돈을 주고 사고 싶은 집을 지으세요.
그게 미학이고, 작가라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의무입니다.”
몇 주가 지나며 나는 글쓰기의 기본기를 채워 나갔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는 여전히 질문이 맴돌았다.
과연, 집은 꼭 벽돌로만 지어야 하나요?
게르가 떠올랐다.
몽골 유목민들이 사용하는 천막집.
겉으로 보기엔 단순하고 허술해 보이지만, 그 안은 영하 40도 바람도 막아낼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
자유롭지만 견고하고, 이동 가능하지만 안정적인 집.
환경에 적응해 온 수천 년의 지혜가 담긴 집.
나는 생각한다.
지도 작가님의 말은 옳다. 그리고 그 말은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내 방식대로 짓고 싶은 집이 있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하지만,
안에 들어서면 투명한 천장이 뚫려 있어 밤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글.
아득한 우주를 꿈꿀 수 있는 글.
그곳엔 붓다가 조용히 앉아 있고,
수정 구슬을 어루만지는 집시가 있으며,
당신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무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글 안에 들어온 누군가가
자신만의 별 하나를 담아 갈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다시 시아버지의 원두막이 떠오른다.
그땐 기울어지고 어설퍼 보이던 집이었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 보면, 그 집에는 ‘처음’이라는 용기가 있었다.
엉성해도 좋다.
내가 쓰는 글이라는 게르 안에,
누군가 하루쯤 쉬어가고, 별 하나 품어갈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꿈꾸는 글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