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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기억, 닭백숙

“모든 기억에는 온기가 남는다. 심지어 닭 모가지 비틀던 그날에도.”

by 명선우

손끝이 시리도록 추운 날엔

따뜻한 국물 한 그릇이 간절하다.


곰탕도 좋고,

얼큰한 육개장도 당기고,

보쌈 곁들인 추어탕도 괜찮지만,

뭐니 뭐니 해도

닭백숙만 한 게 없다.


나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다.

보양식이 끼니마다 달라붙었다.

개구리 뒷다리, 흑염소, 홍삼 달인 물, 용봉탕까지.

그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건

백숙이다.


초등학교 겨울방학 무렵.

대구에서 살던 우리 삼 남매는

양복점 하시느라 바쁜 부모님 대신

엄마의 이종사촌이 계신

경북 춘산의 ‘아지매댁’에 맡겨졌다.


시골 마을 초입에서부터 달려 나와

나를 번쩍 안아주시던 아지매.

메주 냄새, 장작불 냄새,

잠자다 데일 듯 뜨끈했던 군불방.

나는 그 집을 참 좋아했다.


그날도 산 넘고 물 건너

네 시간쯤 걸려 도착했다.

눈 덮인 들판과

얼어붙은 도랑물이 우릴 맞아줬다.


짐을 풀고,

삶은 옥수수를 들고 툇마루에 앉았는데

안방에서 아지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고, 이걸 우짜노!

저기 와 저 들어간노! 이리 안 나오나!!”


군불 지피셨던 아궁이 앞에

아지매가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와예, 무슨 일인데예?”

궁금해서 달려가 물었다.


“야야, 날이 추워 글카나?

알 낳는 씨암탉이

아궁이 안에 쏙 드가가

안 나온다 아이가! 미친 거 아이가!”


꼬챙이로 휘휘 저어도,

좁쌀을 뿌려도,

씨암탉은 따뜻한 아궁이 속에서

사람 구경을 하며 버티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아지매,

급기야 오빠를 불렀다.

“야야~ 보래이! 가가 덕배 아저씨 좀 불러온나!”


잠시 후, 마을 해결사 덕배 아저씨 등장.

이리저리 유인해 봤지만, 닭은 끄떡도 안 한다.


결국, 덕배 아저씨 입에서

“이건 구들장 깨야 한데이”라는 말이 나왔다.


아지매는 이미 닭한테 약이 바짝 올라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안방 한복판에서

곡괭이질이 시작됐다.


돌덩이 깨지는 소리,

먼지 풀풀 날리는 안방,

닭 한 마리 때문에

그날 안방은 완전히 초토화됐다.


1시간쯤 지나

마침내 닭이 끄집어내 졌다.

그리고…

그 씨암탉은

그대로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날 저녁,

우리는 뽀얗게 잘 고아진 백숙 저녁상을 받았다.


가슴살을 발라

소금에 콕 찍어

입에 넣어주시던 아지매.


나는 해맑게 웃으며

냉큼 받아먹었다.

그런데 아지매는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물으셨다.

“아가, 맛있나? 맛있음 됐다!”


한참 후, 어른이 된 내가

문득 그날 이야기를 꺼내자

엄마가 한마디 하셨다.


“그날 그 백숙,

아궁이 안에서 버티던 씨암탉이었다.”


그 닭은

매일 아침 알을 낳던 귀한 닭이었는데,

구들장 깨부수고 난 수리비 생각에

아지매가 홧김에

닭 모가지를 비틀어버렸다고 했다.


알을 몇 년 낳았더라면,

구들장 하나쯤은 뽑았겠지만…


지금도 백숙을 먹을 땐

어쩐지 그날 저녁이 떠오른다.


닭 한 마리 때문에

집을 부수고,

화를 삭이고,

그래도 식구들 밥은 챙겨주셨던

그 시절의 한 사람.


따뜻한 국물보다

더 뜨겁게 마음에 남은

어느 겨울 저녁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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