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나는 밤, 내가 괜찮아지는 여행
어딘가로 떠나기 전 날, 난 늘 망설인다.
과연 오늘은 차 안에서 밤을 보낼 것인가?
어디에서 묵을 것인가?
차로 5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라면, 난 대개 퇴근 후 야간 시간대의 교통편을 이용한다.
여자 혼자 여행을 다닌다는 건 여전히 부담이 있다.
예약 앱으로 숙소를 잡아도,
직접 가본 적 없는 후미진 곳일 수도 있고,
그곳까지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느껴지는 묘한 불안감…
혼자 여행한다는 게 들키는 기분이랄까.
그런 감정이 썩 유쾌하진 않다.
그래서 언제나 고민하게 된다.
숙소를 잡을 것인가?
기차 안이나 심야 우등버스에서 하룻밤을 보낼 것인가?
구례는 나에게 늘 애매한 곳이었다.
차편도 드물고, 이 동네는 모든 시스템이 밤 9시 이후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순천으로 우회하는 경로를 택했다.
야간버스를 타고 새벽녘, 순천 터미널에 도착했다.
인적 없는 새벽 터미널.
첫 차가 오기엔 너무 이른 새벽 4시.
숙박업소를 예약하기에도 어정쩡한 시간.
그래서 나는 순천의 숙소들을 하나하나 들어가 봤다.
입구가 침침해서 싫고,
골목 어귀에 취객이 보여서 돌아 나오고,
어떤 곳은 간판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러브 모텔’처럼 느껴져서 도망치듯 나왔다.
그렇게 다섯 군데를 들락날락했다.
결국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았고,
짐을 풀고 가볍게 손빨래를 해서 널고,
새벽 5시 30분. 그제야 잠에 들었다.
아침 첫차를 타고 구례로 향하는 길.
창밖엔 푸르른 지리산의 풍경이 펼쳐진다.
시원한 버스 안,
뙤약볕이 쏟아지는 창밖 풍경 경계에 기대어 있으니 묘하게 편안해졌다.
예전 명상 수련원에서 함께했던 도반들이 떠올랐다.
그들과 함께 찾았던 화엄사.
지금 그들은 어디서 수행하고 있을까.
구례 터미널에 도착해 화엄사로 가기 위한 차편을 도움 받기 위해 안내 데스크에 갔다.
그곳에서 뜻밖의 인연을 다시 만났다.
2016년 그해 여름,
엄마를 모시고 구례를 여행했을 때 관광택시 기사였던 ‘은서 아빠’.
그분은 이제 관광 해설사가 되어 계셨다.
은서 아빠는 구례를 ‘사람을 살리는 땅’이라 불렀다.
자신만의 사연이 담긴 그 말과,
그가 알려준 구례의 숨은 명소들,
그 진심 어린 애정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
덕분에 나도 구례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은서 아빠께
성삼재를 통한 야간 이동 경로에 대해 조언을 구했더니,
그 길이 안전하면서도 시간도 절약된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렇게 길 위에서 만나는 인연들이
내게 더 나은 길을 알려준다.
참 고맙고, 소중한 일이다.
화엄사 입구에 도착했다.
계곡을 옆에 끼고 천천히 걷는다.
그동안 함께 여행했던 많은 도반들의 얼굴이 스쳐간다.
선연과 악연이 뒤섞였던 수많은 여행들.
이제 와 돌아보니,
그건 모두 나를 연마시키는
상생과 상극의 에너지 작용들이었다.
선연도, 악연도 없었다.
그저, 에너지의 흐름만 있었을 뿐.
불현듯 떠오른다.
‘대화엄의 세계’란,
너와 나의 경계가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보석을 완성하기 위한 연마와 담금질의 과정.
서로가 서로를 통해 완성되는 인드라망의 일부.
다른 줄 알았던 하나,
하나인 줄 알았던 전부.
화엄사 나한전에 앉아 있었다.
나한전의 상징인 여러 나한상 밑에는
누구든 마음껏 보라고 책이 놓여 있었다.
‘고익진 교수님이 들려주는 불교 이야기’라는 책이었다.
나한전의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었다. 눈물이 흘렀다.
어느 순간, ‘나도 부처님의 제자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처님께서 이름을 직접 지어주진 않으셨어도, 내 스스로가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말씀을 듣고 있었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제자, 아난.
그리고 그 순수함을 칭찬하시던 부처님.
혹시 내가 아난의 환생은 아닐까…
순수해서 자꾸 오해받는 요즘.
그 순수를 순수 그대로 알아봐 줄
누군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내 마음을…
누가 알아주는 걸 기대하는 마음은 순수함이 아니다.
본질을 깨닫고 속상했던 나의 좁은 마음을 그제야 놓아본다.
구례. 사람을 살리는 동네.
화엄. 너와 내가 다름이 아니라, 하나이자 전부임을 아는 것.
이 여행을 통해 나는 깨닫는다.
수많은 인연들 사이를 스치며,
나는 점점 더 괜찮은 사람으로 다듬어지고 있다.
구례에서 나는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순수를 순수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넓이를,
그리고 나와 너의 경계가 없는 드넓은 화엄의 세계를
몸으로, 영혼으로 체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