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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 사라진 밤, 달은 나를 비췄다.

빛이 사라져야 보이는 것들

by 명선우

시간이 날 때마다 자연으로 나가는 걸 즐긴다.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라

지인들은 가끔 묻곤 한다.


“어떤 곳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 물음에 아름다웠던 장소들이 스치듯 떠오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깊게 남은 곳은

지리산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의 달빛 산행이다.


새벽 세 시, 보름달이 떠오를 무렵

깜깜한 성삼재 휴게소에서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노고단으로 향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온은 내려가고

내 발끝만 비추는 불빛 속에서

나는 점점 호흡에 집중하게 된다.


늘 당연하게 쉬던 그 숨결에

이토록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들이마실 땐 거칠고, 내쉴 땐 가늘다.

짧고 모자란 숨결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이렇게 거칠고 모자라게 숨 쉬며 살아왔구나.


발끝과 호흡에 집중하며 걷다 보면

노고단 대피소에 닿는다.


그곳에서 헤드랜턴을 끄고,

오로지 달빛에 의지해 걷는다.


세상은 단숨에 흑백으로 변한다.

형형색색이 사라지고

빛과 어둠만이 존재하는 세상.


색이 없으니 욕망도 없다.

분별이 사라진 세계 속에서 나는 걷는다.


흑백 사진처럼 고요한 세상,

달빛이 이렇게 환한 빛을 가질 줄이야.




태양빛에 가려 몰랐던

심연의 품격이 드러난다.


우아하고 단정한 산의 모양,

그윽한 자연의 기운이

가슴 깊이 스며든다.


아!

색에 지치고, 비교에 서러웠던 마음이

달빛의 흑백 세계에서 위로받는다.


색이 없을 뿐인데,

이토록 고요하고 우아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른 이들에게도 말한다.

“한 번쯤 달빛 산행을 해보세요.

색이 사라진 세상의 고요를 꼭 느껴보세요.”

몇 해가 흘러 다시 지리산을 찾았다.

달빛 산행을 다시 하고 싶어

구례의 ‘다락방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다.

그곳의 주인장은 프로 사진작가이자 수행자였고,

보이차를 사랑하며

차의 깊이를 전하는 분이었다.


‘다락방’이라는 이름도

차를 마시며 즐기는 고요한 기쁨을 담고 있었다.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예전에 지리산에서 달빛 산행을 했는데,

그 경험이 정말 경이로웠어요.”


그러자 주인장이 조용히 말했다.


“짐승들도 자야 할 시간이에요.

나무도 잠을 자죠.

그 시간의 고요를 깨뜨리는 건,

우주 만물에 대한 무례일지도 몰라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 그렇구나.


자연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와 예의가 있었구나.


그 말을 듣고부터 나는

이른 새벽의 산행을 조심스럽게 삼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의 달빛 산행이 내게 준 경이로움,

그리고 자연에도 예의가 있다는 그 한마디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이 각인돼 있다.


이제 나는

자연을 ‘정복’하거나 ‘체험’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그 품 안에 머무는 법을 배워가며,

고요히,

겸허히,

함께 숨 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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