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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들리는 가을

들으려 말고 들리게 하라

by 명선우

내 허락도 받지 않고, 가을이 와버렸다.

미칠 듯 겉옷을 벗겨대던 여름의 열기가 길고도 끈질겼다.

가을이 들어서야 할 길목에서,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13일째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백담사를 찾는 일이 연례행사처럼 굳어졌다.

처음엔 단풍을 구경하러 가는 핑계였고,

그다음엔 황태구이를 먹으러 간다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돌아올 때마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보이지 않는 시공간 어딘가에 새기고 오는 듯했다.

오늘도 백담사에 다녀왔다.

홀로 떠나는 여행을 즐기는 나에게

백담사 인근 용대리는 언제나 조금 불편한 곳이다.

혼자 묵을 숙소를 찾기 어렵고,

차편은 일찍 끊겨 늘 출발 시간을 망설이게 만든다.


용대리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백담사로 향하는 길,

창밖 풍경이 낯설게 다가왔다.

단풍의 색이 어둡고 칙칙했다.

13일째 내린 비의 끝자락에는

어쩐지 씁쓸한 우주의 질서가 숨어 있는 듯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곡식이 알차게 여물고, 열매가 단단히 익어

자연의 완성을 이루는 시기.

그러기 위해선 건조해야 한다.

수분이 빠져나가야 단단해지고,

단단해져야 비로소 떨어져 겨울을 맞이할 수 있다.


하지만 13일이나 이어진 비는

그 질서를 흐트러뜨렸다.

단풍잎들은 물기를 머금은 채 무겁게 처졌고,

형형색색의 나뭇잎들은 하나둘 갈색빛으로 스러져갔다.

‘지구 온난화’

그 단어가 문득 머리를 스쳤다.

단풍놀이로 치부하기엔, 너무 조용하고 너무 깊은 위기였다.

그 틈새로,

하늘빛을 닮은 옥색 물줄기가 바위를 때리며 포효하고 있었다.

자연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 살아 있음은 인간의 손길보다 훨씬 더 단단해 보였다.


백담사로 오르는 길목엔 작년에는 없던 데크길이 놓여 있었다.

원시의 자연은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두면 좋으련만,

인간은 끝내 ‘편리’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깎고, 뚫고, 세운다.

오늘의 백담계곡은

말없이 화가 난 듯했다.

‘미안합니다.

우리가 무지해서, 10년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백담사 마당에서 탑돌이를 할 즈음,

초와 공양미를 팔던 보살님이 외쳤다.

“오늘은 윤달이 낀 음력 구월 초하루예요.

오늘 초를 밝히면 일 년 내내 무탈합니다.”


그 한마디에 사람들은 너나없이 초를 사 들고 달려갔다.

나 역시 처음엔 시큰둥했다.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다가,

이내 나도 그 속에 있었다.


‘무탈하다’는 말 한마디에

이만 원이라는 거금을 선뜻 내고

초 위에 몇 자를 적어 넣었다.


산신각으로 올라가 깊이 머리 숙여 인사드렸다.


‘설악산 산신령님, 안녕하십니까.

서울 사는 수행자 선우라고 합니다.

오늘 이곳에 제 모든 시름을 내려놓고 갑니다.

소소한 욕심들도 이 자리에 두고 가오니,

비워진 마음으로 돌아가 지금을 살아내겠습니다.’


남들은 알아주지 않을 내 작은 원(願)을

그곳에 조용히 내려놓고 왔다.

수렴동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길은

백담사 아래에서 다시 커지고 깊어졌다.

비췻빛 물결 위로 노랗고 갈색으로 물든 잎사귀들이

서로 기대어 흘러내렸다.

그 황홀한 풍경을 더 담아보려다

그만 발목을 삐끗했다.


순간, 마음속에서 한마디가 솟아올랐다.


‘보려고 하지 말고, 보이게 하라.

들으려 하지 말고, 들려지게 하라.’


무언가를 유심히 보려 눈에 힘을 주면

그만큼 마음의 기운이 새어나간다.

하지만 조용히 기다리면

풍경은 스스로 다가와 내 안에 머문다.


물소리를 들으려 귀를 세우면 긴장하지만,

그저 들려지길 기다리면

소리는 스스로 투명하게 내 곁에 와 앉는다.


삶도 그렇다.

무엇을 더 보려 목을 길게 내밀지 말고,

보일 때까지 기다려라.

무엇을 더 들으려 귀를 세우지 말고,

들려질 때까지 고요히 머물러라.


오늘 백담사와 그 계곡의 자연은

그 단순하고 명징한 메시지를 내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알았다.

삶의 깊이는 애써 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 속에서 스스로 다가오는 것임을.


보려 하지 않아도, 들으려 애쓰지 않아도

진심으로 기다리는 마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저절로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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