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이 목을 조이는 순간, 나는 비로소 숨을 마주했다
연극 연습 중, 연출가님으로부터 발성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체격이 좀 있으니 성량이 풍부할 줄 알았는데,
직업적 습관 때문인지 목으로만 말하고 공명점이 목에 머문단다.
가슴 밑으로 소리를 내려보내야 한다고 했다.
“숨을 쉬며 말하세요! 숨!”
‘내가 지금 숨을 쉬니까 살아 있지. 숨을 안 쉬면 죽었겠지.
도대체 숨을 안 쉬고 말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말을 도무지 수긍할 수 없었다.
며칠 뒤, 근막 교정 마사지를 받았다.
강남에서 ‘신의 손’이라 불리는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숨골이 막혔어요. 이제껏 숨을 어떻게 쉬고 사셨어요?
횡격막 아래로 숨을 내려보내지 못했네요.”
숨골이 막혔다니, 그건 또 무슨 뜻일까.
숨골은 뭐고, 숨을 안 쉰다는 건 도대체 어떤 상태일까.
그 의문을 안고 목소리 테라피를 배우러 갔다.
연출과 교정, 두 선생님이 했던 말을 전하자
소리 테라피 선생님은 조용히 말했다.
“어릴 적에 트라우마가 있었을 거예요.
지금은 책임을 지려는 듯, 목에 힘을 주며 말하고 있어요.
당신의 목소리에는 ‘책임감’이 잔뜩 실려 있네요.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안쪽에서 알 수 없는 울컥함이 올라왔다.
‘책임감이 묻어나는 목소리,
책임을 담은 경직된 목소리가 왜 이리 슬픈가.’
얼마 전, 친정엄마가 넘어져 갈비뼈가 부러지셨다.
병원에서는 “깁스도 소용없으니 움직이지 말라”라고 했다.
그런데 며칠 후, 화장실을 가려다 또 넘어져
다른 갈비뼈가 부러졌단다.
결국 앉은자리에서 볼일을 보는 실수를 했고,
소변으로 흥건히 젖은 이부자리 위에서
젖은 속옷바람으로 울며 나에게 전화를 거셨다.
주말이라 조퇴가 어려운 나는
걱정을 안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엄마의 황망하고 비참한 목소리를 듣다 보니
처음엔 그 마음이 안타까워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상하게 화가 치밀었다.
늘 교인을 챙기고, 봉사에 열심이던 엄마.
정작 엄마는 타인에게 베푼 만큼 돌려받지 못하고,
가진 것도, 여유도 없는 가족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이 화가 났다.
내가 힘들 때 늘 다른 이를 챙기던 엄마의 뒷모습이
언제부턴가 섭섭함으로 쌓여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아무것도 못 해서,
이부자리에서 넘어져 소변을 보고,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울먹이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불쌍함보다 서운함이 앞서는 내 마음에
나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그 순간, 내 가슴이 조여왔다.
엄마의 목소리가 내 어깨와 가슴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가 짊어져야 할 짐처럼 들렸다.
숨이 막혔다.
‘숨골이 막혔다’는 말,
‘책임감이 목을 누른다’는 말이
하필 이때 가슴 깊숙이 공명했다.
불쌍한 노모보다,
그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 내가 더 서러워졌다.
소리 없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매 순간 긍정으로 살아내던 내가 무너지던 날이었다.
비로소 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는지 마주한 순간이었다.
아, 어쩌면 좋은가.
기꺼이 짊어지고 가야 할 삶이,
책임지려 할수록 도망가고픈 무의식이,
내 숨골을 막고 있었다는 것이
커튼 너머의 풍경처럼 막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