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음악이 내 삶으로 들어왔다.

시대공감

by 명선우


실버레인, 실버레인…


초등학교 4학년의 어느 겨울, 나는 유난히 어려운 산수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옆방에서는 중학생 오빠가 빨간색 작은 라디오를 틀어놓고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청아한 여자의 목소리가 자꾸만 “실버레인, 실버레인…” 하고 흘러나왔다.


어린 나는 그 음색에 홀린 듯 귀를 기울였다.

그날따라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단어는 ‘실버’와 ‘레인’.

용기를 내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 지금 노래 뭐야?”


오빠는 공부하던 책받침을 살짝 들춰 나에게 보여주었다.

Olivia Newton-John – Silvery Rain.

하얀 드레스를 입고 금발을 날리며 환하게 웃고 있던 그녀는,

그 순간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때부터 오빠가 듣던 영어 라디오를 같이 엿들었다.

그 목소리의 세계가 너무 선명했으니까.


중학교에 들어간 어느 날, 옆자리 친구가 빨간 마이마이를 들고 왔다.

까만 스펀지 헤드폰을 낀 채 어깨를 들썩이며 세상 신나 보였다.


“뭐 듣고 있어?”


그 친구는 말없이 헤드폰을 내 귀에 씌워줬다.

첫 소절, 내 귀에 ‘출발, 출발…’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건 Wham! – Wake Me Up Before You Go-Go의 “jitterbug”였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음악이 가슴 아래쪽에서부터 튀어 오르는 감각을 알았다.

피아노 전주가 날 끌어올리고, 조지 마이클의 청량한 목소리가 문을 열었다.

내 안의 흥이 점화되었다.


스무 살.

동네 친구가 소개해 준 기타리스트 오빠를 만났다.

그는 헤비메탈을 연주했고, 기타가 **악기이자 검(劍)**처럼 느껴졌다.


그를 통해 잉베이 맘스틴을 알았고,

처음 Far Beyond the Sun을 들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기타 소리가 나를 날카롭게 베고 갔다.


메탈의 계보를 외우고, 보컬과 기타리스트 이름을 씹어가며

음악의 언어가 내 세계로 깊이 스며들었다.


돌이켜보면 음악은 언제나 누군가의 손을 거쳐 내게 왔다.


오빠의 빨간 라디오,

짝꿍의 빨간 마이마이,

기타리스트 오빠의 빨간 펜더기타로…


누군가 건네준 소리들이 나를 만들었다.

그러니 음악은, 처음부터 혼자 듣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 몰랐다.

좋아하는 것을 누군가와 함께 듣는다는 건,

내 마음을 건네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는 걸.


이제야 안다.

내 안으로 들어온 음악은,

언젠가 또 누군가의 세계로 건네질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해파랑길 완보… 그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