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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말을 건넬 때…

멈춰야 알게 되는 것.

by 명선우

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몸이 먼저 나를 멈춰 세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비로소 알게 된다.

아픔은 단순한 증상이 아니라 ‘신호’라는 것을.

말없이 눌러두었던 감정과 밀어둔 질문들이

작은 통증을 타고 조용히 떠오른다.


그 신호가 찾아온 날, 나는 연이틀을 앓았다.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올라왔고, 손끝 하나 까딱하기도 싫었다. 차가운 물에 손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시렸고, 내복을 껴입고 방 안 온도를 높여도 소용이 없었다.


지인들의 전화와 문자가 연이어 왔다.

‘몸조리 잘하라’는 메시지를 읽으면서도

어딘가에서는 얼른 일어나야 한다는 의무감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밀린 잠을 보충하듯 잠이 쏟아졌고, 잠결에도 골골거리며 앓았다. 전쟁터를 다녀온 사람처럼 잠들었다 깨어 밥을 먹고, 또 잠들었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좋은 물과 음식을 챙겨 먹으며 회복하려 애썼다. 누군가는 생강청을 보내주고, 누군가는 걱정을 담은 문자를 보냈다. 그런 관심을 받으며 ‘아, 내가 참 열심히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뜨근한 생강청 녹인 차를 마시며 ‘든든해야지… 얼른 낫지!


그때 마음이 말을 걸어왔다.


‘얼른 나아서 뭐 하려고?’

‘응? 낫기만 하면 예전처럼 여기저기 다니고, 밀린 글도 쓰고, 연극 연습도 하고….’

‘거 봐. 몸만 낫게 해 주면 또 몸을 혹사시키며 살려고 하잖아?’

‘어? 그게 혹사시키는 거야? 난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는데….’

‘응. 아무도 너에게 그렇게 살라고 하지 않았는데, 너는 너무 많은 걸 너무 열심히 하려고 해. 그게 너에게 어떤 의미일까? 몸이 탈이 날 정도로….’


맞았다.

몸만 낫는다면, 나는 다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쪽잠을 자고, 5분 만에 밥을 씹지도 않고 넘기고, 강의 장소로 헐떡이며 이동하는 삶을 시작하려 했을 것이다.


이틀 동안의 몸살은 묻고 있었다.

그 열심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향해 있었는가.


요즘 결가부좌 수행을 하고 있다.

요가의 나비자세로 한 시간을 귀한 문구를 외우는 수행인데, 30분쯤 지나면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 시푸르 딩딩해진다.

마치 시체의 색깔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결가부좌를 하며 외우는 구절이 있다.

무주객, 무선악, 무빈부, 무고저, 무음양, 무생사, 무이합, 무래거, 무시말, 무쟁인, 무건병, 무미추, 무향취, 무호괴….


그중 ‘무호괴(無好壞)‘에서 자꾸 멈추게 되었다. 다리가 저려 피가 안 통하고 아픈 것—이것은 괴로움일까?

그렇다면 아프지 않은 상태는 즐거움일까?


문득 이 구절이 내게 다시 묻는 듯했다.


세상에는 본래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 둘을 가르는 건 결국 내 마음이었다.

아픈 것은 무조건 나쁘고, 안 아픈 것은 무조건 좋다고 믿어온 것도 내가 만든 판단일 뿐이었다.


몸살만 나으면 또 욕망을 따라 곳곳을 뛰어다니며 몸을 혹사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안 아픈 상태’가 오히려 나를 더 괴롭게 하는 건 아닐까? 피곤에 절어 밥을 씹지도 않고 넘기고,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정작 무엇이 즐거움이고 무엇이 괴로움인지조차 잊은 채 살아온 건 아닐까?


결가부좌를 하며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물었다.

무호괴(無好壞)

무엇이 호였고, 무엇이 괴였느냐?


강제로 주어진 육체의 고통 속에서

멀리 떠나 있던 정신이 서서히 몸으로 돌아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픔을 느끼는 이 순간,

내 영과 혼과 육이 한자리에 모이는 듯했다.

몸이 아파야만 내가 얼마나 정신없이 세상을 향해 욕망을 펼치며 살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아프지 않았다면, 또 기차표를 끊고 버스 노선을 살피며 밖으로 나갈 준비에 몰두했을 것이다.


이틀을 앓았다.

아직 다 낫지 않았지만 집 안의 밀린 분리수거를 말끔히 버리고 구석구석 청소했다.

내 안과 바깥을 볼 여유가 이제야 생겼다.


쌓여 있던 일들을 정리하며 알게 되었다.

아픈 게 나쁜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는 나를 아픔이 억지로 붙잡아 세웠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는 것을.


아픔이 말을 걸어올 때,

그때를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아픔은 내가 끌고 가던 세상을 잠시 멈추게 하고, 내가 가야 할 길을 다시 비추어주는 순간이기도 하니까.


이번 몸살은 조용히 속삭였다.

좋다·나쁘다를 가르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즐거움이라 믿었던 바쁨이 오히려 나를 소모시키고 있었고, 괴로움이라 여겼던 아픔이 오히려 나를 살리고 있었다.


멈춘다는 것은 뒤처지는 일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방향을 고르는 일이다.

아픔이 멈춤을 통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살아가는 방식에도 호흡이 필요하다는,

단순하지만 가장 잊기 쉬운 진리였다.


좋음도 없고 나쁨도 없다는 무호괴의 자리에 서 보니 아픔마저도 스승이었다.

몸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방식으로 나를 깨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몸살이 내게 말을 걸어준 것처럼,

나는 그 말에 귀 기울였고 아픔 속에서 나의 현재를 봤다. 참으로 고마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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