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사

삶이 얼어붙는 순간, 말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by 명선우

새벽까지 온갖 잡일을 했다.

갱년기인지, 요즘은 자야 할 시간을 놓치면 그 뒤로는 잠이 오지 않았다. 괜히 서랍을 열어 싫증 난 옷을 정리하거나, 모아두었던 타로 카드들을 종류별로 나누고,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분야별로 옮기다 보면 지루하던 밤이 지나 아침이 왔다.


창 너머 짙던 어둠은 푸른 잉크가 물 위에 번지듯 흐려졌고, 하늘 한쪽은 서서히 오렌지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아침이 오고 있었다.


그러다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선뜩한 느낌에, 뭔가 크게 실수한 것 같은 예감으로 눈을 떴다. 습관처럼 방 안을 훑고,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08:00.

오래된 감각처럼 불길한 시간이었다.


곧바로 보일러를 확인했다.

56.


집 안 어디에도 없는 온도였다. 보일러가 단수로 인한 고장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반사적으로 날씨를 확인했다. 영하 13도.

수도꼭지를 틀자 꼭지만 허공을 돌뿐, 물은 나오지 않았다. 수도가 얼어버린 것이다.


작년 이맘때, 이 집으로 이사와 처음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수도가 언 줄도 모르고 새벽에 변기를 내렸고, 용수철 하나 빠진 듯 맥없이 돌아가는 손잡이를 붙잡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차마 아래를 볼 수 없어 뚜껑을 덮고 나왔다. 출근을 앞두고 양치도 못하고, 저녁 샤워를 미룬 나를 후회했다. 결국 동네 목욕탕에 들러 몸을 씻고 출근했다.


수도를 녹이는 공사를 하는 사장님은 예약이 밀려 내 차례까지 사흘이 걸린다고 했다. 기온 덕에 특수였다. 그때 남편은 본가에서 30리터짜리 락스통을 구해 물을 담아 세 통을 가져왔다.


푸르뎅뎅한 통의 물을 아껴 쓰며 며칠을 보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필요한 건 물이겠구나 싶었다. 물의 소중함을 그때 처음 실감했다. 그리고 수도를 녹이는 데 든 비용은 20만 원이었다.


이번 겨울만큼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새벽 네 시까지 멀쩡히 쓰던 수도는, 내가 잠깐 눈을 붙인 그 사이에 다시 얼어버렸다.


이를 어쩐다.

또 얼었다고 말하면 이번엔 잔소리로 끝나지 않을 텐데.


망설였던 이유는 혼날까 봐도, 돈이 아까워서도 아니었다.

내가 그 3-4시간의 공백을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해 서였다.


“수도가 얼었어.”


“어쩌다가? 어이구. 나 지금 천안에 상갓집 와 있어. 바로 출발할게”


전화를 끊고 몇 번이나 내 머리를 꿀밤 때렸다.

멍청하긴.


두 시간쯤 지나 남편이 도착했다. 열선, 콘센트, 공업용 드라이어를 챙겨 왔다. 내게서 헤어드라이어를 빌려 뒷마당 계량기 쪽으로 갔다. 계량기 안에 드라이어를 넣고 수건으로 감싼 채, 온도를 조절하며 천천히 녹였다. 한쪽 벽을 타고 올라가는 파이프에는 200도까지 올라가는 공업용 드라이어를 대고 있었다. 작년 공업사 사장님이 이런 식으로 하던 걸 잘 봐둔 덕이라며 어깨를 으쓱이며 남편은 아는 척을 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문득 삶 속의 남편이 겹쳐 떠올랐다.

내가 진통으로 정신을 놓을 때도, 공항으로 여행을 떠날 때도, 아이의 입학과 졸업의 순간에도 친정아버지가 소천하시고 뭘 어째야 할지 모르는 그런 황망한 순간에도 남편은 늘 내 곁에 있었다.


잔소리는 많고 생색도 낸다.

하지만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렵고, 부끄러운 순간마다 그는 험한 일과 추운 날씨를 마다하지 않고 해결사를 자처했다. 삶 속 동맥경화처럼 뭔가 정체되고 원활하지 않던 모든 순간을 남편을 통해 뚫어 나가고 있었다.


잠시 후, 수도꼭지에서 시원한 물이 콸콸 쏟아졌다.


“여보, 물 나온다!”


“그래? 아이고, 이제 됐다.”


기쁜 마음에 건물 뒤편으로 갔다.


“물 잘 나와. 정말 고마워.”


남편은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볼에다 뽀뽀 좀 해봐.”


안 하던 소리를 했다. 난 남편의 이 안 하던 소리를 이해한다. 얼마 전 남편의 절친이 喪妻를 했다. 임종을 며칠 앞두고 호스피스 병동에 있을 때 남편 친구의 와이프를 보고 왔던 모양이다. 그 꺼져가는 모습에서, 슬퍼하던 친구의 모습에서... 어쩌면 남편도 나의 모습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남편에게 안 하던 짓을 해주고 싶어졌다.


쉰다섯 살 뚱뚱한 아줌마가 덥석 남편을 안고 영하에 날씨에 빨개진 볼 위에다 두툼한 입술을 처억 얹었다. 쪽~


“여보, 정말 고마워.

당신은 끝내주는 해결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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