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거북이 토토와 나
톨스토이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한 나그네가 길을 걷다 우물에 빠졌다. 우물 밑에는 독사가 있어 내려갈 수가 없다. 올라가려니 사자가 아가리를 벌리고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우물 벽에 매달려 떨고 있는데 칡넝쿨 하나가 보인다. 넝쿨을 붙잡고 겨우 지탱하고 있는데 구멍에서 흰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나와 뿌리를 갉아먹는다. 시간이 지나면 넝쿨 뿌리는 다 쏠려 우물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때 바로 옆에 있는 벌통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꿀이 한 방울 떨어지려는 찰나 혀를 대고 맛을 보며 ‘아 달다!’라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라고 하였다.
톨스토이가 바라본 인생은 끝이 보이는 시간과 연속된 고난을 순간적인 행복감으로 잠시 잊으며 견디는 존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동물의 삶과 같은 고난의 연속이라고 하였다.
참 힘든 시기가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뭘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하고 밤에는 잠을 잘 수 없었다. 괴로움이 거의 피크였을 때 아이와 함께 '아기 거북 토토의 모험'이라는 3d 영화를 봤다.
바다거북 토토가 모래밭에서 알을 깨고 나와 바다갈매기와 게가 형제를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살육의 현장을 벗어나 바다에 도달하고 나면 72시간을 떠다니며 의탁할 곳을 찾는다. 갓 태어난 아기 거북이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한 번도 쉬지 못한 채 바다를 헤엄쳐 다니다가 3일 만에 해초더미를 만나 처음으로 잠을 자는 모습에 힘들다고 괴로워하던 나의 모습이 대비되며 '난 토토에 비하면 편안한 삶을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동물의 삶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아기 거북이 토토의 생은 이후에도 고난과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단 한 번도 편안하거나 무탈하게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그런데도 토토는 원망하거나 쉬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그저 묵묵히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그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조용히 생을 위해 전진해 나가는 작고 나약한 동물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 나는 인생에 고난이 닥치면 ‘왜 나에게 이 힘든 시련이 왔는지, 억울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속으로 화를 내고, 책임을 전가할 대상들을 스캔하며 비난하고 미워하기 바빴다. 그러나 영화에서 토토는 너무나 의젓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묵묵한 생의 실천을 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좋지 않은 상황이 나에게 오지 않기를,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 두려워하고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수 천 번도 넘게 파도처럼 왔다 갔다. 하지만 토토가 보여줬던 담담한 받아들임과 묵묵히 실행해 나가는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길을 가다 보면 어떻게 저런 곳에서 피었을까 싶게 척박한 환경 속에 꽃을 피운 식물들이 있다. 그들도 자신의 환경을 탓할까? 힘들다고 삶을 원망할까? 앞날에 힘들고 귀찮고 고생스러운 날들이 올까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할까? 토토가 그랬듯이 때로는 작고 나약한 식물이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生)을 살아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스승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톨스토이는 '인간이 자신의 그릇된 인생관에 의해 한계가 지워지고 있는 생명의 작은 한 부분을 인생이라고 해석하는 데에서부터 죽음의 공포와 인생의 고난이 시작된다."고 한 말을 타인의 인생, 더 나아가 다른 생명체의 삶을 바라보며 깊게 생각해본다. 토토는 내 인생을 못 보지만, 나는 토토의 삶을 볼 수 있다. 삶이란 무엇인지, 고통과 죽음은 무엇인지, 나의 삶이 타 생명체에게 미치는 영향과 그 관계 속에서 나의 선택과 의지는 무엇인지를 고민해보는 것이 톨스토이가 말한 동물의 삶을 넘어서는 인간의 이성적 사유와 사랑이 필요한 이유를 찾는 시작점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