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퍼스 하이(Helper's High)
“100세가 넘어도 묻는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한 동네 친구가 이제는 백세 인생이라며
선물로 슬쩍 건넨 책의 제목이 김형석 선생님의
[백 년의 지혜]였습니다.
책을 볼 때면 가장 먼저 목차를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목차의 시작이
"100세가 넘어도 묻는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였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라는
삶이 끝날 때까지 하는 그 질문에 대해
제가 만난 겨울나기들은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태어난 이유에 대한 부정이며 존재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드는 답변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할 수밖에 없게 된 이는
더욱 아프고 슬픕니다.
우리네 인생의 과업이 쓸모를 찾는 일인 듯합니다.
쓸모를 찾지 못하거나
쓸모를 잃어버리면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참으로 힘들어집니다.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이 되니까요.
코칭 중 만난 남학생은
우리가 흔히 명문대라 일컫는 K 대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시각장애(저시력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이 사실을 가족 외에 주변에 알리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본인도 그랬지만 자신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을 가족들이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자신이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안경을 갈아 끼워도 칠판에 적힌 선생님의 수업 내용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짝꿍에게 물어보다 수업 시간에 떠든다며 오해를 받아 혼이 나기 일쑤였습니다.
마음이 더욱 불편했던 건 자신의 질문 때문에 짝꿍까지 덩달아 혼나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폐를 끼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지요. 복도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 집중하다
미간이 좁혀지며 인상을 쓰게 되면, 상대방에게서 "너 나한테 불만 있냐"며
시비조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열심히 살아내고 있었지만
내가 정말 쓸모 있는 인간인지 모르겠더라는 겁니다.
학교의 간판은 명문이었지만,
존재의 이름은 '쓸모없음'으로 규정짓고 있었습니다.
우울감이 지속되고
살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계속되자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지인의 도움을 받아
시각장애 학생들만 있는 특수학교를 찾아가
봉사활동을 하게 됩니다.
시각장애 학생들만 있는 곳을 찾아가려고 했던 이유는 사실 봉사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나와 같이 시각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고 합니다.
저들도 나처럼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으로 우울하게 사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 놀라운 장면을 목도하게 됩니다.
자신은 저시력 장애인이라 흐릿하게 사물이 보이지만,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전맹의 아이들이
마치 보이는 것처럼 웃으며 해맑게 복도와 운동장을 뛰어다니더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습니다.
그날 이후 무언가 자신 안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봉사를 지속적으로 다니게 되었고,
아이들의 필요를 채우고 도왔습니다.
아이들은 '목소리가 잘생긴 선생님'이라며 자신을 따르고 반겨주었습니다.
나와 같지만
나와 다른 반응으로
살아가는 아이들.
그 아이들을 돕는 과정을 통해
'아, 내가 쓸모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민하던 자신의 진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NGO 단체에 입사하여 교육 현장에서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작은 헌신이라도 하겠다고 말이지요.
사실 학생이 하게 된 봉사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봉사활동은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를 경험하게 합니다.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는 다른 사람을 도울 때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입니다.
미국의 내과의사 앨런 룩스(Allan Luks)가
2001년에 출간한 '선행의 치유력'이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입니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혹은 돕고 난 후에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따뜻하게 가득 채워지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긍정적 변화는 생각보다 긴 시간 유지 됩니다.
연구 결과, 다른 사람을 돕는 선행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회복케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결과가 입증된 것입니다.
그에 이어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건강이 좋을 확률이 10배나 높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가 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돕는 이타성,
선행은 겨울을 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같은 맥락으로 아일랜드 리머릭 대학의 크리 벤 박사 연구팀은 유럽 15개국 27,301명을 대상으로 한 폭넓은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봉사활동 참여가 우울증 증상을 완화하고, 더불어 사람들과 연결되었다는 사회적 유대감을 굳건히 하는 데 객관적으로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라는 질문에,
존재를 묻는 이 질문에,
나의 쓸모를 답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나는 존재의 이유가 있다."라고 말입니다.
봉사는 타인을 돕는 선행을 넘어,
겨울나기들의 내면을 치유하고
봄으로 가는 소중한 기회가 되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