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파도를 가르는 기술
아이들은 영원히 우리 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소중한 시간을 마치면,
부모가 만들어 놓은 안전지대를 넘어
스스로 날아오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삶의 고난 속에서,
때로는 견디기 어려울 것 같은 폭풍과 파도 속에서도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견디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잠시 파도를 피했다고 해서 그 파도가 영원히
나를 비껴가는 것이 아니니까요.
우리의 삶은 바다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따스한 햇살 아래 잔잔하게 반짝이는
물결의 평온함에 감탄하다가도,
어느 날 갑작스럽게 시커먼 구름 아래 몰려드는
폭풍우에 두려워 떨기도 합니다.
시린 겨울 바다의 바람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갑고 거칩니다.
저는 아홉 살 무렵 큰아버지 댁에 놀러 갔다가
바다에 빠진 뒤로 물이 무서워졌습니다.
신혼여행에서 배를 타고 나가
바다 수영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수영을
즐겼지만, 저는 배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두려움을 순식간에 해방시켜 준
풍경이 있었으니, 바로 '윈드서핑'입니다.
'윈드서핑은 단순히 스포츠를 넘어 바람과 물,
그리고 자연과 깊이 소통하는 특별한 경험'이라고들 합니다.
윈드서핑을 배우는 초보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이해하는 것.'
우리도 삶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감지하고,
그 바람을 피하기보다 마주 보고
대화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알아야
그 바람을 타고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 넘어지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바람을 거스르며 맞짱을 뜨기보다는
흐름과 의도를 읽고
바람을 타고 나가는 지혜가
나를 좀 더 아껴 줄 수 있는
방법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서핑을 잘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물에 자주 나가는 것이며,
다양한 바람의 조건과 물의 상태를 경험하며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물과 바람의 만남으로 태어난
다양한 파도를 경험해야 합니다.
경험은 바람과 파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돕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파도도 두렵게
생각되지만 그 파도를 겪어내고 나면
생각보다 내가 파도를 탈 줄 아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2025년 여름,
대학에서 진행하는 진로·취업 코칭을 통해
K라는 여학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체장애와 지적장애를 함께 가지고 있는
중복장애인입니다.
K는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학생이었습니다.
늘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으며 살아왔기에,
이제는 자신도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어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취업 준비보다 더 큰 고민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사고로 지체 장애인이 되면서
부모님은 모든 것을 대신해 주셨다고 합니다.
자신을 사랑해서라는 것을 알기에
묵묵히 받아들이고 의지했다고요.
평소 K는 휠체어를 타고 이동했지만
가까운 거리는 힘들어도 제 발로 걷고 싶어
보행기구를 이용하는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0대 시절,
걸음걸이 때문에 친구들이 놀리는 상황이 생겼고
속상하고 화도 났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몰라 우물쭈물했더랍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K에게 당찬 구석이 있었고
다음에 만나면 "놀리지 마."라고 큰 목소리로
혼을 내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속상한 마음에 언니에게만 했던 이야기를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언니가 꺼내게 되며
부모님이 알게 되었고 난리가 났습니다.
부모님은 당장 직접 상대 아이와 부모를 불러 따지셨고
애들이 그러면서 클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상대 아이의 부모의 말에 더욱 화가 나
결국 큰 다툼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물론 그날 이후 그 아이의 놀림은 중단되었고
저를 본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속상하셨을 부모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저는 제가 해결해 보고 싶었습니다.
언제고 저에게 이런 일이 또 생길 수 있으니까요.
저를 지키기 위해 말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날 이후
비슷한 일이 생겨도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상대방에게도 대응하지 않았으며
목구녕까지 올라오는 감정들을 마음 깊은 곳에 욱여넣었습니다.
그렇게 K는 겨울에 갇힌 채 스물한 살이 되었습니다.
제가 만난 K는
인생의 바다에 나와 바람과 물을,
그렇게 만들어진 파도를 이해할 기회들을 놓치고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아빠와 엄마의 커다란 날개가 안전했지만
그 아래 갇혀 제 날개를 펼쳐보지 못해
제 날개로 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되었던 겁니다.
날개가 있었지만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던 것이지요.
부정적 자기 인식의 골은 매우 깊고 짙었습니다.
관점의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여덟 번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때론 웃고 울며 공감했지요.
K와 제 사이에는 안전감이 형성되었고
어느 순간 K가 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식상하지만 자기 긍정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것을 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나에게 고마운 것 5가지"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고 준비가 되면
글로 작성해 보자고 했습니다.
작성한 글을 읽어 보겠냐고 했더니
"도리도리"로 대답합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읽어볼 테니 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K가 K에게 고마운 것 5가지.
1. K야, 나를 포기하지 않아 주어 고마워.
2. K야, 세상의 비난에도 무언가를 하려는 열정이 있어 고마워.
3. K야, 이 힘든 세상 살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버텨주어 고마워.
4. K야, 그럼에도 배려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고마워.
5. K야, 이런 세상과 나를 이해하고자 노력해 주어 고마워.
학생에게 이제 본인이 직접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학생의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그리고 꾹 눌러 참으며
감사를 읽을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울고 싶지 않다고요.
지금까지도 울지 않고 잘 참았다고요.
그래서 그날은 듣기만 해도 된다고 말하며
제가 직접 여러 차례 학생이 작성한
감사 5가지를 들려주었지요.
그리고 일주일 후,
K는 눈물이 나더라도 한 번 해 보겠다며
스스로에게 감사한 5가지를 읽어 나갔습니다.
K는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존재에 대한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던 것이죠.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실 수 있지만
10년간 장애학생들을 만나며
저는 K와 같은 어려움을 경험하는 학생들을
자주 만납니다.
1학기의 코칭을 잘 마치고
K는 2학기에 또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작지만 자신의 걸음으로
자신의 날개로 나는 연습을 해 보겠다고 합니다.
그동안 눌러왔던 감정, 생각에 대해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고요.
그렇게 K와 저는 어제까지 다섯 번을 만났고
세 번의 만남이 남아있습니다.
상처는 인생의 겨울에 너무도 쉽게
흔적을 남기지만
회복은 갑절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친 파도를 가로지르는 윈드서퍼처럼,
여러분과 저도
감사로 저 거친 인생의 파도를
멋지게 타 보면 좋겠습니다.
작은 감사로 하루를 채우고
그런 하루들이 모이고 모여
우리의 겨울에 봄을 부르는 씨앗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엊그제 버스에 내려
회사로 오르는 길에
양쪽으로 심어진 나무와
높고 푸른 하늘,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저도 모르게 눈이 감아졌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이
제 뺨과 눈썹 밑에
시원한 간지럼을 태웁니다.
나를 빗겨가지 않고
내게 들려
가을의 선물을 주고 가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