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입력값, 당신의 선택은?

반응 vs 선택

by 겨울나기 이코치

푸른 눈의 제프


푸른 눈의 소년은 양쪽 팔이 없는 채로 태어났습니다.

공원을 거닐 때면 자주 보게 되어 나도 모르게 시선이 머물곤 했습니다.

가끔은 어머니와 함께, 또 어느 날은 홀로 공원에 나와 거니는 아이의 모습이 기억에 남곤 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를 시작하며,

성도들에게 전할 설교를 준비하기 전에는 저만의 의식처럼 공원을 찾아 걷곤 했습니다.

걷다 보면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고 생각도 잘 정리되었습니다.

그날따라 하나님의 이끄심이었을까요,

아이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습니다.

아이는 예쁜 푸른 눈에 저를 담고는 제 인사를 반갑게 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제프'라고 소개했습니다.

그 후로 제프와 저는 긴 시간 동안 공원을 함께 거니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제 생일이었습니다.

푸른 눈의 소년 제프와 그의 어머니가 함께 저희 집을 찾아왔습니다.

언젠가 제게 물었던 생일을 기억하고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제프와 어머니는 작은 꽃다발과 정성껏 접은 종이 한 장을 선물로 건네주었습니다.

정성껏 접힌 선물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눈에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그 안에는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이 담겨있었습니다.

녹음이 가득한 공원에 두 사람이 함께 걷고 있습니다.

푸른 눈의 백인 소년이 있었고, 그 소년 옆에는 눈이 옆으로 살짝 찢어진 동양인 남자,

바로 제가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림 위에는 제프가 남긴 편지가 있었습니다.

지금껏 다른 사람들은 팔이 없는 저를 무서워하며 피하기만 했어요.
공원에서 엄마를 제외하고 제 옆을 걸어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저와 함께 걸어주어 정말 감사합니다.

제프의 어머니께서는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발가락 사이에 크레용을 끼고 그림을 그렸다고 하셨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장씩 그리고 버리기를 반복한 끝에, 마침내 완성된 그림이 나왔다고요.

소년은 그렇게 온 마음을 담은 그림을 제게 선물했던 것입니다.


소년은 자신의 곁을 걸어주는 이가 엄마와 동양인 남자, 단 두 사람뿐이라고 불평하거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년은 엄마 외에 자신과 함께 걸어주는 또 한 사람이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미국에서의 목회 생활이 결코 녹록지 않은 환경이지만,

저는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면서도 그것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내게 없는 것을 바라보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것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것.


감사는 고통과 고난을 뒤집는 역전을 경험하게 하는 기회입니다.


주일 목사님의 설교 말씀 중, 마음에 깊이 머물게 된 일화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말씀을 급히 따라 적느라 설교 노트는 지렁이 밭처럼 되었지요.

지렁이 밭이면 어떻습니까, 감사의 깊은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해 주신 목사님의 일화가 고스란히 담긴 이 노트 덕분에 제 마음은 밥을 먹지 않아도 행복의 포만감으로 가득해졌습니다.




감사하기를 그쳐 나타난 '호구'


우리나라에는 '대한민국감사국민위원회'라는 기관이 존재하고,

2012년부터 시작된 감사 운동으로 포항시는 '감사도시 포항'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도 감사의 영향력을 잘 알고 실천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누군가의 친절과 배려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감사할 만한 상황에서도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영화 <부당거래>를 보면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호구'라고 부르는

현 대한민국 사회가 저는 참 안타까웠습니다.


요즘 유튜브 영상을 보면,

'호의를 베풀었더니 호구? 호구되지 않는 법',

'나를 호구로 여기는 사람들의 특징 3가지' 등과

같은 제목의 영상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사람들의 친절과 배려를 '호구'라 칭하며 이용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고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친절과 배려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호구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러한 현상이 우리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선량함으로 비롯된 친절과 배려에 우리는 그저 "감사합니다."를 선택하면 되는 게 아닐까요?

그들을 호구로 만드는 것은 그들이 정말 호구여서가 아니라,

감사하기를 그친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 씁쓸한 현실이라 생각됩니다.


겨울나기들을 만나보면 으레 자신의 친절과 배려에 대해 감사를 받기보다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

이용만 당하는 느낌이 들어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친절하지도 배려하지도 말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보다 좀 더 우리 서로에게 감사를 표현해 보면 어떨까요?



감사는 선택이다.


"감사하고 싶어도 감사할 것이 없다."


이 말은 삶이 너무 고되고 아파서 감사를 찾을 힘조차 없을 때 나오거나,

아니면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더 집중하며 살아갈 때 하게 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감사를 찾기 전에,

아프고 고된 삶에 대한 깊은 공감을 통해 위로받고 옥시토신이 발생하여 회복 탄력성이 작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하지만 후자라면 다음 이야기를 통해 감사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감사를 대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감사에 대한 반응과 선택


감사에 대해 반응하는 사람과 감사에 대해 선택하는 사람.


감사에 대해 반응이라는 입력값을 넣는 것,

감사에 대해 선택이라는 입력값을 넣는 것,

입력값이 다르니 그 결괏값은 분명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원치 않는 상황에서는 환경을 탓하거나 자신을 탓하고, 오직 원하는 상황이 있을 때만 감사가 나오는 사람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감사에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감사를 하려면 반드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감사하다."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가 원하는 상황보다 원치 않는 상황이 삶에 더 자주 찾아옵니다.

만약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감사할 수 있다면,

지금 내가 가지고 누리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공기가 있기에 숨을 쉴 수 있으며,

밤이 있기에 잠을 자며,

낮이 있기에 새로운 날이 시작됨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감사를 '선택'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할 줄 아는 것이지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의 마음으로 상황을 역전해 바라봅니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과 어려움 중에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을 헤아리며 감사합니다.


어느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암에 걸리자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며 관계가 정리되더랍니다.

치료가 끝날 무렵 암이 재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사람은 한 번은 다 죽지, 뭘 그렇게 걱정해요. 죽을 때가 되면 죽으면 되는 거지."라고

말하며 떠나는 사람들을 겪으면서, 암의 재발 소식보다 더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선교사님은 그때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암으로 짙은 겨울과 같던 인생의 계절을 지나고 다시 사역의 현장으로 돌아갔을 때,

선교사님은 다른 이의 아픔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원칙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겨울을 나고 계신가요?


그 겨울 안에도 분명 당신 안에 머물러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머물러 있는 것들을 감사로 세어보면 좋겠습니다.

월, 수, 금,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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