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절, 정리가, 끊어냄이 정말 답일까?
헬리 나우웬(Henri Nouwen)의 글을 대학시절부터 참 좋아했습니다.
특히,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는 제 인생에 두 번째로 깊은 영향을 끼친 책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그의 메시지는 제 영혼의 폐부를 찌르고 흔들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아주 좋은 방향으로 말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20년 넘게 살아오면서 저는 상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상처는 그저 인생의 혹독한 겨울을 여는 문고리 같았고, 저의 치부나 실패의 흔적이라고 여겼습니다. 상처가 창피했습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만 알고 있기를 바라는 모난 구석이기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헬리 나우웬의 글들은 저의 관점을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 삶을 그리고 세상을 용기 있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빛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내 상처가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인생에서 처음 만난 상처의 쓸모는 지금껏 제 삶을 지탱하는 중심축이 되어주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현재 강의와 코칭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면서 저의 상처를 기꺼이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의 상처가 다른 이의 상처를 덮는 효과 좋은 연고가 되어주고 있으니까요.
여러 매체에서 다음과 같은 제목들이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지금 당장 손절해야 할 인간관계 유형 5가지"
"내 인생을 망치는 독이 되는 관계, 과감하게 끊어내는 법"
"이런 말을 하는 친구는 즉시 버려야 합니다"
"내 인생을 갉아먹는 관계, 더 늦기 전에 정리하세요"
"가스라이팅하는 친구, 손절이 정답인 이유"
"당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사람, 끊어내는 법"
요즘 사회관계망(SNS)이나 여러 매체에서 관계를 ‘무 자르듯’ 끊어내야 한다는 식의 제목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영상에서 소개하는 방법들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우리가 끊어내고 정리하려는 것의 본질은 '관계'라는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구체적인 '사람' 그 자체일 수 있습니다. ‘관계’보다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면, 누군가를 정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감정을 동반하는지 더욱 여실하게 다가옵니다. 사람이 싫어 자연인이 된 사람도 있고, 사람과의 만남이 고달파 고립을 택한 사람도 있습니다. 관계가, 사람이 이토록 힘들다는 것이지요.
저의 경우, 지금보다는 20~30대 시절에 사람으로 인해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뒤에서는 냉소적인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진짜 의도를 알 수 없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관계의 피로도가 극에 달했던 분명한 이유는 제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 채, '사람이 재산'이라는 말을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일에 제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결혼식 기념 촬영 때 자리가 없어 직장 동료들이 사진을 함께 찍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무튼 저는 갈수록 더해지는 관계의 피로감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위에 언급된 제목처럼, 만날 때마다 찝찝하고 힘든 관계는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정리해야 한다는 말에 백번 공감하며 매몰차게 끊어내기도 했지요. 어떻게든 편안해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흔 중반을 바라보는 지금, 제게 가장 감사한 것은 바로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재산’이라는 의미도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와 질’이라는 관점으로 새롭게 정립되기도 했고요. 예전에는 관계에 열을 올리던 제가 사실은 지극히 내향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말주변이 좋다 보니 늘 외향형으로 오해받기 일쑤였죠.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 타고난 성향이 그렇다 보니 사적인 공간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관계를 형성할 때는 제 속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곤 했습니다. 그런 제가 20~30대에 억지로 에너지를 만들어 관계를 이끌어갔으니 지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이런 저를 저 스스로는 이해하지만, 타인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일일이 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설령 설명을 한다 한들, 상대방이 저를 이해하려는 의도가 없다면 소용이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저는 저를 이전보다 훨씬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진심으로 즐기고 좋아한다는 것, 많은 관계보다는 몇몇 사람과 친밀하게 오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 그리고 홀로 조용히 글을 쓰는 저만의 시간이 스스로에게 평화와 행복을 준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 자신을 배려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관계의 에너지도 관리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언제부턴가 우리가 사람에 대한 '손절'과 '정리'를 너무 빠르고 쉽게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살면서 어떻게 내 마음과 똑같은 사람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저도 영상의 제목들처럼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 손절하고 관계를 정리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이 긍정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더라는 겁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나 또한 누군가의 손절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경험 또한 생각보다 쓰라리고 아픕니다.
이러다가 남아나는 관계가 있을까 싶습니다.
스스로를 반성하며,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의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에 나오는 글귀를 자주 떠올립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어렵게 느껴질 때, 서로의 다름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때, 때로는 그 안에서 상처를 받게 될 때도 이 글의 내용을 다시금 되뇌어 보곤 합니다.
당신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라,
관계가 힘들 때는 사랑을 선택하라,
서로 하나 되기 위해 상처 입고 쓰라린 감정 사이를 거닐라,
마음으로부터 서로 용서하라.
삶의 혹독한 계절, 즉 '겨울을 나는 이들'을 만나보면 앞서 영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관계를 정리해야 할 특성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상에서 소개하는 방식대로라면,
우리는 그들을 손절해야 하고, 정리해야 하며, 내 인생에서 끊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겨울을 나는 이들 곁에 머무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적어도 다정함을 지닌 단 한 사람이라도 곁에 있어야, 그들도 언젠가는 다시 따뜻한 봄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다정한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용기를 냅니다.
쓰라린 감정 사이를 기꺼이 거니는 담대함을 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내로 용서를 이루어 끝끝내 함께 봄을 맞이합니다.
손절과 정리, 끊어냄이 아니라,
한 번에 한 사람씩,
다정함으로 품어 안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작은 자리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조금은 더 온기 있고 안전한 곳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