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이 많으면 그 역할만큼 해야 할 일도 많고, 그 과정에서 갈등도 자주 발생합니다. 엄마로, 아내로, 그리고 딸이자 언니, 며느리, 한 회사의 대표까지.
저는 꽤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수많은 역할이 무거운 짐이라기보다, 지킬 것이 많아 소중한 인생이라 여기며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게도 모든 역할이 거대한 바위처럼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새해가 밝았고 홈페이지 개설과 SNS 홍보, 기관의 민간 자격 준비를 위한 강의안 리뉴얼, 그리고 책 쓰기까지 업무가 참 많았습니다. 제가 좋아서 시작했고 꼭 필요한 일들이기에 즐겁게 임했습니다. 큰아이의 진로와 둘째 아이의 관계의 문제, 셋째의 학습 지도 등 넘쳐나는 일들 속에서도 스스로를 다독이며 오늘 하루에 집중하려 애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아이의 복싱 대회 출전을 앞두고 예기치 않았던 일이 생겼습니다. 아이는 자신의 체급보다 한 단계 낮은 체급으로 출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체중을 감량하고 있었습니다. 체육관에서 구두로 직접 신청했기에 당연히 출전 준비가 잘되고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대회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아이를 어떻게 데려다 줄지 확인하던 중, 출전 신청이 누락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직접 가서 신청했기에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체육관 측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사과가 아닌 제가 절차상 잘못을 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뿐이었습니다. 소식을 전하자 아이의 얼굴에 실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사실 점 하나처럼 지나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서운한 아이의 마음을 잘 달래어 다음을 준비하는 현명한 태도를 보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갑작스럽게 마주한 이 상황이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억울함과 화가 치밀었습니다. 관장님과 여러 차례 대화를 시도하며 제 의도를 설명하려 들었지만, 그럴수록 대화는 본질에서 벗어나 겉돌기만 했습니다.
그날,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해진 저는 남편에게 차에 혼자 있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남편은 제 부탁을 들어주었지만 차마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먼발치서 저를 기다리는 듯 보였습니다. 아마 저를 향한 남편만의 다정한 배려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그 다정함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 감정은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대며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억눌렸던 눈물이 갑자기 터져 나왔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정말 별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목놓아 울만큼 커다란 사건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차 안에서 마치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가끔 모든 것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마치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 마음이 정리되지 않으니 다른 사람에게 처지를 하소연하며 답을 찾으려 합니다.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하고 싶고, 혼란이 주는 내적 갈등과 두려움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일수록 잠시 멈추어 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수면 아래로 흙탕물이 가라앉아 물이 맑아지기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흙탕물은 휘저을수록 더욱 흐려지고, 결국 혼란만 가중될 뿐이니까요. 침전물이 가라앉아야 시야가 선명해집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혼란의 본질을 명확히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눈물을 쏟아낸 그 밤, 저는 잠시 멈추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사하게도 다음 날 가족들과 강원도 여행이 예정되어 있었고, 카페에 앉아 조용히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바다에는 높고 낮은 파도가 쉼 없이 밀려들었습니다. 가만히 바다를 응시하며 깨달았습니다. 수시로 몰아치는 파도 역시 언젠가는 가라앉아 잔잔한 물결이 된다는 것을요.
그리고 다음 날 어두운 바다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어둠 또한 영원하지 않으며, 태양은 매일 떠오르며 어둠을 걷어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어두운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돋이를 보며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어둠은 영원하지 않다.
태양은 매일 떠오르며 어둠을 걷어낸다는 사실이
제 마음을 정돈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을 고요히 보냈습니다. 그러자 흙탕물이 가라앉고 맑아진 물속으로 제 혼란스러웠던 마음도 서서히 정리되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잘 해내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던.
제 내면의 균열을 달래 주지 못한 탓에 벌어진 일임이 보였습니다.
잠시 내려놓는 시간도 필요했지만 역할에 대한 열정으로 밀어붙였던 제 욕심도 보였고요.
하루에도 수 없이 넘어지는 겨울.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언제나 찾아오는 그 겨울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넘어진 겨울에서 일어나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