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식구'라는 책 표지에 이런 문구가 쓰여있던 게 기억난다. 가족들도 고향집도 독립하기 전에는 그렇게 답답하더니 독립하고 나선 그립다. 타지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집 생각이 많이 난다. 가까이서 지내다 보면 답답함이 스멀스멀 또 올라오고 그래서인지 매번 투닥거리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이상한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익숙한 그 동네가 주는 안정감은 분명히 존재한다.
긴 연휴 내내 부산을 떠나 집에 머물렀다. 혼자 사는 나의 작은 공간에서 나는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생활이 이어지지만, 집에 가면 북적북적 어디엔가 누군가는 함께하기에 긴장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말 그대로 게으른 동네 백수 1. 지금 부산 자취방에 누워 긴 연휴 동안 특별할 것 하나 없었던 평범한 순간들을 곱씹어보며 몰래몰래 그들을그리워해볼까 한다.
먹을 것에 심히 진심인 사람들
우리 가족들이다. 어느 하나 먹는 것에 진심이 아닌 사람이 없고, 그래서 다이어트는 늘 숙명처럼 짊어지고 사는 이들이다. 더 이상 차례상을 차리지 않지만 오롯이 우리 식구 먹고 싶어서 명절상을 준비한다. 바리바리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모여서 전을 부치고 갈비를 졸이며 반나절을 꼬박 음식장만에 쏟아붓고 그 자리에서부터 열심히 먹어치운다.
하염없이 부쳐댄 전
매년 명절마다 몇 시간 음식마련에, 그 곱절의 시간 동안 체력회복의 시간까지 더해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내년에는 제발 좀 간소화하자'라고 입을 모아 다짐하지만 다음번 명절이 도래하거든 식욕을 참지 못해 또 바리바리 장바구니를 채운다. 내가 사랑하는 이상한 사람들은 이렇게 식탐과 식욕이 가득해 항상 부른 배 두드리며 매년 생고생과 후회, 그리고 소화불량을 반복하고 있다(꿀꿀!)
이제는 귀신으로 함께하는 비글 꾹
내 브런치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알겠지만, 우리 가족은 반려견으로 비글 한마리와 7년을 살다가 올해 초 떠나보냈다. 슬픈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다. 다소 괴짜스러운 우리 식구들은 꾹이가 어쩌면 귀신으로 함께하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그래서 꾹이를 추억하다 가끔 꾹이의 말썽 전력을 읊거든 꾹이 귀신이 들을 수 있으니 속삭이곤 한다.
한동안 집안 곳곳에서 출몰하던 꾹이의 털이 조금 뜸해졌을 때 다시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옷장 속에 고이고이 숨어있던 꾹이의 흔적이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하자 또 방구석 어딘가에 꾹이가 함께하는 느낌이 들었다. 전을 훔쳐먹고, 방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싹싹 치우며, 갈빗대에 남은 고기를 뜯어먹은 뒤 뼈는 나중에 몰래 먹으려고 제 이불속에 감추어두던 꾹이에게 명절은 생일이었다. 우리 식구를 닮아 식탐만은 어느 개에도 뒤지지 않던 먹보개 꾹. 왁자지껄 식구들이 모이거든 자기도 꼭 껴달라며 이 사람 저 사람 틈에 붙어 두툼한 엉덩이를 들이밀던 꾹이를 우리 가족은 매년 명절마다 아주 많이 그리워한다.
우리의 그리움을 꾹이는 알까?
동네 친구들은 언제나 그곳에 있어
누구에게나 고향의 동네 친구들은 익숙함 그 이상의 존재들이다. 때로는 유치원까지도 거슬러가며 시작된 오래된 이 인연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가치관과 성향에 따라 조심스럽게 맺어가는 인연과는 다른 편안함이 있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누군가는 동네 친구를 만나면 쌍욕이 난무한다고 했다. 나의 동네 친구들은 만나면 잔소리가 하염없이 꼬리를 문다. 정말 매번, 한순간도 빼먹지 않고 매번 국밥, 뼈해장국, 분식 등 뚝배기 속 지글지글 끓는 뜨거운 국물을 들이켜며 서로 감당 못할 치부가 없다는 듯이 민낯에 속내까지 모두 드러내다 보면 다시금 학창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쌍욕과 잔소리 일색이지만 내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이들이 보다 나은 미래에서 보다 행복하고 건강하게 무탈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진심만큼은 매년 변함이 없다.
카페 가봤자 결국에는 순대국밥에 막걸리더라
달라진 명절, 달라진 의미
명절의 의미가 점점 더 현대화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 옛날 모여서 차례상 한가득 올릴 귀한 음식을 마련하고, 차례를 올리고, 바리바리 음식과 그 해 수확한 식재료를 챙겨주던 시골집의 모습은 해를 거듭할수록 기억 속으로 사라질 모양이다. 긴 명절휴가를 보낼 방법으로 해외여행을 택하는 이들도 부쩍 늘었고, 국내 여행지 이곳저곳 역시 찾는 발길들이 매년 더 늘어가고 있다.
우리 집 역시 따로차례를 지내지 않아시간 되는 친지들이 가볍게 모여 하루 정도 같이 식사할 뿐이다. 그래서 이번 명절에는 일상에 치여 시간에 쫓겨 미뤄왔던 여유를 즐겼다. 동생과 함께 하루 손세차도 해보고, 귀농한 이모네를 찾아 강아지도 만나보고, 그간 미뤄왔던 캠핑도 시도해 보았다. 특히 연휴 내내 가을이 완연한 날씨라 당근으로 마련해 둔 텐트와 캠핑용품 게시를 했더니 꽤나 손쉬워서 추위가 오기 전에 부산 근교에서도 미니멀 캠핑을 떠나볼까 한다.
미니멀캠핑이지만 힐링하기에는 충분했다
유교와 전통의 과거 명절에서, 지친 일상 속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휴일로 그 의미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다. 바뀌는 명절 모습에 누군가는 아쉬울지도 모르겠지만, 의미는 가벼워질지언정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귀한 시간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길어도 길어도 아쉬운 명절 끝자락을 보내고 다시 부산으로, 일상 속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다. 왁자지껄 일주일이 꽤나 즐거웠는지 조용한 부산의 방이 조금은 외롭게 느껴진다. 일상과 루틴의 시동을 켜서 다시 트랙으로 돌아와야 하지만 고향집에서부터 몰래 따라온 작은 게으름을 등에 업고 이번 주말까지만 누워서 빈둥빈둥 체력을 충전해야지.
돌아온 일상, 돌아온 부산살이 다시 한번 파이팅이다.그리고 이 글을 읽는 이름모를 당신의 일상복귀 역시 조용히 응원을 보내고 싶다. 우리 인생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