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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만보 Jun 14. 2023

어처구니없는 마이 라이프

이상한 나라의 할머니-나의 직업 연대기

내 직업은 에디터다. 영화 <지니어스>에 나오는 콜린 퍼스처럼 뛰어난 에디터는 아니지만, 나는 이 일을 좋아하고 애정한다. 호기심 많고, 싫증을 잘 내며, 변덕이 죽 끓듯 해서 한 우물을 오래 깊이 파지 못하던 나에게는 안성맞춤인 직업이다. 거의 두 달마다 다루는 글이 달라지고, 매번 만나는 작가가 다르고, 엉뚱한 상상을 펼칠 자유가 있으니 너무나 멋진 일 아닌가. 두뇌 회전과 시력만 받쳐준다면 앞으로 20년쯤 더 이 일을 하고 싶다.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두 분 저자에게 “최고의 에디터”라는 칭찬도 들었으니 여한도 없다.




에디터가 되기 전의 나는 아주 잠깐 기업체 독일어 강사로, 좀 오래 영어․독일어 번역자이자 시골학원 영어 선생으로, 그리고 몇 번쯤 프리랜스 글작가로 일했다. 짐작 가능한 궤도를 크게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이 일들은 나의 로망이 아니었다. 독일에 갈 때만 해도 나는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고 싶었고, 그곳에서 나를 각성한 후엔 영화를 만들고 싶었으며, 전공을 바꾼 뒤에는 출판사를 차리고 싶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또 소설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엉겁결에 이민 간 캐나다에서 먹고살기 위해 초밥 만드는 법을 배우면서 로망은 다 사라졌다.      


나랑 남편은 캐나다 이민 시절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곤란한 상황을 다 겪었다. 눈물을 쏟으며 C++로 프로그래밍을 배우다 포기했고(남편은 무사히 과정을 마치고 씨게이트라는 제법 알아주는 회사에 취직했으나 석 달 후 독일인 매니저랑 대차게 싸운 뒤 그만뒀다), 하루도 놀 수 없다는 각오 아래 나는 한국 유학생 집에 도우미로 나갔고 남편은 한국인이 하는 배추농장에 노동자로 일을 나간 적도 있다. 물론 둘 다 딱 하루 만에 그만뒀지만 말이다. 나중엔 일식집이 잘 된다는 이야기에 남편과 나는 회를 뜨고 초밥 만드는 법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밤이면 피곤한 몸을 누인 채 당시 유행했던 한국 드라마 <국희>를 보며 한국 수퍼에서 사온 과자를 우걱우걱 먹어댔다. 언제나 목이 꽉 메었다.  


그렇게 2년 10개월이 지나는 동안 한국에서 살았던 전원주택 한 채가 날아갔고, 대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둥이를 얻었다. 그리고 만 3년을 딱 한 달 남겨두고 우리 가족은 짐을 싸서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역이민은 오직 용감한 자의 몫이었으니까)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정했던 친척이랑 친구들, 그리고 마음이 쓸쓸할 때마다 먼 길 달려가 만났던 로키마운틴을 가슴에 넣은 채. 지친 몸으로 공항에 도착했던 그 밤, 라운지에 쓰인 한글을 보며 기뻐했던 기억이 지금도 나에겐 삼삼하다.      



이후 나는 늦깎이 에디터로서 인생 2막을 열었다. 이따금 화장실에 가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하루종일 내 가시는 감춘 채 남의 가시밭을 뒹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일을 배웠고, 일의 재미를 알아갔다. 새로운 책을 기획하고, 저자를 발굴하고, 유명인을 섭외하면서. 물론 일 년 열두 달 남의 글을 만지는 데 올인하다 보니 이제는 일기 쓰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혹자는 이걸 ‘산업재해’라고 부른다.) 괜찮다, 다 괜찮다. 그게 뭐 대수인가. 다만, 아직도 내게는 하고 싶은 일이 몇 가지 더 있어서 그 욕망을 잠재워야 하는 것이 좀 슬프긴 하다. 누가 알겠는가, 내 직업의 연대기에 다른 이름 한두 개 더 추가할지도 모를 일. 어처구니 없는 마이 라이프는 아직도 진행 중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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