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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숙녀 Nov 16. 2021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으로 바꾸고 하루가 외로워졌다

3주쯤 됐으려나. 우연한 기회에 에어팟 프로를 장만했다. 지난 4년여 진자리 마른자리 안 가리 애써준 에어팟 1세대에게 안식년을 줘야 할 것 같아 감행, 기계에 관심 없는 나로선 나름 큰 지출이었다.


모름지기 개 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 했던가. 그렇담 기계에 관심이 없는 만큼 더 알아보고 요리조리 따져보고 사는 것이 마땅했겠으나, 관심이 없으니 알아보는 일이 귀찮았고 이어폰 뭐 처음도 아닌데 하는 생각과, 애플 개발자 지들도 사람인데 전보다 뭐 하나라도 나아졌겠지 하는 생각소비는 신속히 이뤄졌다.


아는 게 없다고 걱정할 건 없었다. 어차피 서로에 대해 모르기는 나나 얘나 한가지. 그동안 학습 온대, 는 그을 한 귀에 하나씩 쏘옥 넣으면 될 것이었고, 그들은 내 귓구멍에 포옥 하고 몸을 맡기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결과는? 역시나 성공적.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요 손톱만 한 게 뭐라고 얼른 출근하면서 써보고 싶은 마음에, 하마 면 밤잠을 설치는 주책을 부릴 뻔했을 정도로 디자인 착용감, 잠깐 맛 본 성능까지... 내가 쓰기엔 이보다 좋기도 힘들 노릇이었다.




다행히도  설치는 일 없이 면으로  밤을 보낸 뒤, 드디어... 새 이어폰과의 공식적 첫 일정! 출근길.

 

 뭐지? 끼고선 줌바댄스를 춰도 떨어질 것 같지 않은, 내 귀를 전담마크라도 한다는 양 타이트하게 핏 되는 이 미친 착용감은?


역시 돈이 좋고 기술이 좋다며 본격 파워워킹에 박차를 가하는데... 희한했다. 이 대로변의 아침이 언제부터 이리도 차분했단 말인가. 분명 어제도 도떼기 시장이었는데... 또 우르르, 다다다 정신없기가 전쟁통 같던 역 안어떻게 이렇게 고요할 수 있지? 왜? 어째서? 생각하수차례. 답은 내 귀에 있었으니...


모든 게 이어폰 덕었던 것이다. 이어폰이 귀에 콕 박히는 순간, 속세의 모든 번뇌로부터 out! 외부의 분주함은 다른 세계 이야기더라니. 내게 이렇듯 때아닌 평온함을 선사해준 것의 이름은 바로,


노이즈 캔슬링:
주변 소음을 차단 또는 상쇄시켜
잡음 없이 소리를 잘 들리도록 도와주는 기술

 

참 좋은 세상이었다. 이어폰이란 게 있어주는 것도 고마운데 착하게 선도 없애주더니, 이젠 기특하게 소음까지 차단해주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너 이 자식, 이름이 괜히 에어팟 '프로'인 게 아니었어.


주변 소음이 없어진 채 내가 택한 멜로디로만 나의 귓가가 채워진다는 건 실로 놀라웠다. 슬픈 노랠 들을 때면 꼭 내가 어느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된 것 같질 않나. 그냥 길을 걷는 게 전부인 일이어폰만 꽂았다 하면, 폴킴이 오직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느낌이니 이건 뭐 매일이 콘서트요 데이트인 기분이었다.


적어도 얼마간은......


인생사 뭐든 일장일단인 법. 위기는 금세 왔다. 내가 듣겠노라 택한 소리만 듣고 오롯이 그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분명 큰 기쁨이었지만 거기엔 생각 못 한 그늘이 존재했다. 내가 걷는 거리에 움직이는 존재가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 바로 그러했다.


차 소리, 사람 소리, 기계 소리... 무엇 하나 듣지 않으면서 길을 걷는다는 건 굉장했다. 마치 거리에서의 극기체험 같았달까. 갑자기 차나 오토바이가 사방에서 튀어나오기 일쑤였고, 휴대폰에 정신을 팔기라도 하면  사람을 보고 귀신이라도 본 양 놀라야만 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신경은 곤두섰고 이건 뭐 노래가 귀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도보의 연속이었다.


위험한 것만 문제는 아니었다. 한 번은 퇴근 후, 저녁 약속 장소에 갔을 때였다.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툭툭' 누군가 어깨를 치기에 처음 오는 동네에서 대체 누가? 놀라서 뒤를 보니 회사 상사 분이었다. "어머 국장님!?" 응? 국장님 입모양은 분주히 바뀌는데 왜 목소리가 안 들... 아 이어폰.. 후다닥 이어폰을 빼니 그제야 모든 게 명료해졌다.


"뒤에서 몇 번을 불렀는데 너무 못 듣는 체하고 가는 거 아니냐"


아... 회사 근처가 아닌 데다 사람 많은 곳이라 더 그랬을까. 나보다 어른에 상사이신 분이 내 이름을 몇 번을 크게 부르셨을 걸 생각하니 죄송하고 감사했다. 니 사실 따뜻했다.


와, 근데 그걸 나는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칠 뻔 했던 것 아닌가? 여러모로 고맙다 빨간불!! 혹여나 초록불이라 내가 그냥 갔더라면, 난 이런 일은 꿈에도 모르고 뒤에서 상사가 부르건 말건 내 갈 길 가겠다는 개썅 마이웨이가 될 뻔했을 텐데. 사놓고도 몰랐을 괜한 오해를, 살 뻔한 위기를 네 덕에 넘겼구나.


아찔한 경험은 뿐만 아니었다. 한 번은 새벽 당번이라 이르게 출근하던 길. 어차피 자동결제될 터였으니 내릴 때 감사하다는 인사만 하면 되겠단 생각에 모처럼 노래에 심취했는데, 무언가 흐릿하게 말소리가 들리기에 혹시나 싶어 "네? 기사님? 뭐 얘기하셨어요?"라 여쭈었더니, 기사 아저씨 목을 길게 빼시며 말하시길.


"회사 올 때까지 신호가 한 번 안 걸렸다구요. 손님께 오늘 좋은 일이 있으려나봐요"


아... 맨날 들을 수 있는 이깟 노래가 뭐라고. 하마터면 이 따뜻한 인사를 이 스윗한 감성을 놓칠 뻔했다 생각에, 나는 정말로 그 자리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노이즈 캔슬링. 좋지. 분명 좋은 기능인데,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소음엔 길가의 차 소리, 사람 소리,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내 하루의 안녕을 빌어주는 인사는 포함되지 않. 윗집 발 망치 소리, 윗집 문 쾅쾅 닫는 소리, 옆 건물 공사하는 소리. 그런 것만 안 듣고 싶은 건데.


이 일 저 일 다 겪고 보니 이건 이어폰 잘못이 아니라, 애초에 내 일상이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과는 어울리질 않아 생긴 일이었다.


가만 독립된 공간에서 아무 장애물 없이 음악이고 영상에 오롯이 몰입할 수 있는 상황아닌 애가, 겁도 없이 사람 사는 소리들을 차단하고 살려고 했으니. 그만 하길 천만다행인 일들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전에 쓰던 에어팟 1세대로의 회귀를 결심했어도, 그냥 살 땐 세상 시끄럽고 정신없어서 듣기 싫다 여겼던 거리의 온갖 소리들이 사실은 꽤나 들음직한  것들이고, 또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것들이란 귀한 사실을 배웠으니, 에어팟 프로를 산 것을 후회하진 않겠다 자평하려는데,


역시 애플 개발자들도 사람이었다. 글쎄 노이즈 캔슬링 기능은 옵션이었던 것!!  on/off가 가능하단 걸 얼마 전에 알아버렸고, 그 덕에 위험과 외로움에서 자유자재로 내 인생을 컨트롤하는 능력자가 되어 하루하루를 지내게 됐다. 이건 마치 세상의 소리를 관장하는 신이 된 기분이랄까. 인생 진짜.

 

노이즈 캔슬링빛을 발할 때는 지하철에서 잘 때. 꿀잠 가능. (단, 원하는 역에서하차는 책임 못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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