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이 요즘따라 얼마나 꼴 보기 싫던지. 질문을 받을 때마다, 퇴근하고 꼭 뭘 해야 해요? 지금까지 일했는데?라는 말이 입술을 비집을 기세라참느라 애를 먹었다.
퇴근: 일터에서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거나 돌아옴
진심으로 궁금했다.국어사전도 저리 말하고 전쟁터에서도 일단 오늘은 가라며 풀어준 마당에퇴근하는 것도 일인 이서울 바닥에서, 자기 전까지 그 얼마 안 되는 시간에도 굳이!꼭!정녕! 무얼 해야만 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안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청춘엔 직무유기 인생엔 대역죄, 한 순간에 범죄자 되는 건가. 저는요 어떤 날엔 집에 가만 누워서 쉬는 것도 힘든데요 하면?
그 길로 노답인 애 되는 거고?
근데 그럼나도 하나만. 내가퇴근하고 뭐 하는지는 대체 왜 물어보는 거야? 내가 오늘 저녁은 뭘 하고 보낼지 진짜 그게 궁금해서? 에이 그럴 리가.
퇴근하곤 뭐하냐는게 정말 순수히나의 오늘 저녁에 대한 호기심이라면 얼마든 고마운 관심으로 받아들일일이겠지만, 문제는 그 질문에서의 퇴근은대게 특정한 날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그러니까 거기서의 퇴근 후란 매일의 퇴근 후를 말한다고 보면 되는 것.
정리해보자면 '퇴근하고 뭐하세요?'는 사실,
운동하시나요?공부하는 거 있으세요? 따로 배우는 건? 활동하시는 동호회? 등등… 을 다 합친 한 마디
자기 계발 or 자기 관리, 하시나요?
인 셈이었다.
내가 저 질문을 주로 받은 건 소개팅이나 회사, 또는 딱 지인이라 할 만큼의 안면만 있는 이들로부터였다.
굳이 비중을 따지자면 역시나 소개팅이 압도적.그 자리에 내가 안 나가는 일은 있어도 저 질문이 안 나오는 일은 없다고 할 만큼, 100% 출석을 자랑했다.
어쩜 당연한 거였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 둘이 세상 정적인 분위기에서 대화를 해야 하는데 저만큼 만만한 물음이 또 어딨겠는가. 무슨 답이 나오든 얘기할 꺼리는 다양하고돌발은 생기기 힘든 안전빵 질문.
그러니 소개팅에서의 저 질문이란 그저 매뉴얼에 따른 것뿐이란 걸알면서도,희한하게 들을 때마다 달갑지가 않았다. 속 뜻 그대로 묻지 못할 말이면 하질 말지, 뭘 저렇게 숨겨서 물을까?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도 그럴게지금까지의 데이터로 보았을 때,저 질문은 내 여가가 궁금해서라기보단 내가꾸준히 관리하면서 성장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알고 싶어던지는 경우가더 많았기 때문이다.
허나 아무리 안 달갑다한들 쌍방이 치르는 면접인 소개팅에서, 뻔히 알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 안 하는 건 또숙녀의 자세가 아닐지니,몇 번은 생각을해봤더랬다. 퇴근하고뭘 한다고 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는지.
1. 운동해요.
나이가 드니 체력이 확실히...
그러다 예뻐지기까지 하면 더 좋고요.
2. 어학 공부요.
코로나 끝나면 어디든 갈 건
그땐 통역 앱 없이 갈 거예요!
3. 요리 배워요.
요리만큼 배워서 남 안 주는 것도 없는 것 같아요.
4. 동호회 하는 게 있어서요.
책 읽어요.
이거라도 안 하면 한 달에 한 권도 못 읽는 거 있죠.
... 별안간 현타가 왔다. 그냥 일상을 얘기하면 그만인 거였는데도 뭐랄까.
저 이렇게 열심히 살아요! 꾸준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알아주세요! 하는 느낌이랄까. 퇴근 후 누가누가 더 열심히 사나 배틀하는것 같은 그런 거.
저녁을알차게 보내는 게 얼마나 멋진 건진 나도 아는 바. 말이 퇴근이지 출근이 코앞으로 다가온 그 얼마 안 되는시간을 쪼개, 새로운 걸 배우거나 이미 가진 걸 더 갈고닦는다니. 그 밤을 몽땅 쉬기만 해도 피로 회복이 안 되는 이 바쁜 현대사회에분명 박수받아 마땅할 노력과 투자지 암.
그걸 모른다는 게 아니라, 내가 불만인 건그것들이 대단한 거라고 해서 그 반대가 하찮은 것처럼 돼버리는 공식이었다. 여가에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하면 바로 '빈둥빈둥'을 붙여 생각하고, 관리와 발전이라곤 없는 도태된 인생쯤으로 여기는 시선 같은 거.
오지랖을 넘어 오만같았다. 꼭 물 밖에서 뭔가 열심히 해야만 인생뜨겁게 사는 건 아닌데.보기엔 그저 물에 둥둥 떠 있는 게 다인 것 같아도,그 속에선 가라앉지 않으려고 죽을힘 다 해물장구를 치고 있을 수도 있는 건데. 우리가 볼 땐 세상 편해 보이는 오리도사실 물 밑에선쉬지 않고 발헤엄을 치듯,사람도 같을 수 있는 건데말이다.
생각이 저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그 질문에 신물이 났고 그래서 한 번은,
"그냥 쉬어요. 뭘 하고는 싶은데 딱히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일단 퇴근하면 피곤해서 뭐든 할 에너지가 없는 거 있죠"
해봤더랬다.짧지만분명 봤다. 실망하는 표정.
"하시는 운동이나 그런 건 없는 거예요?
뭐 배우시는 건?여행은요? 전시회 같은거보는 건 안 좋아해요?"
아유 하죠 운동.
쉬지 않고 인생을 배워가는 중이고,
여행은 갈 수만 있으면 언제든 콜.
전시회도 볼 줄 몰라 그렇지 우와하면서 잘 봐요.
근데 그게 중요한가요. 아무것도 안 한다 답할 때의 저와 저것들을 한다고 할 때의 제가 각기 다른 사람인 건 아닌데 말이에요.
퇴근 후의 시간이 곧 미래인것처럼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당장 오늘을 사는 것도 버거운 요즘, 성장과 발전만 대단하다할 게 아니라, '유지'하는 것도 그 못지 않게 훌륭한 일임을 알아주는 센스를 지녀준다면 서로가 좀 더 편해지지 않을까?